천주교(天主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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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Catholic Church)를 한자로 번역한 용어.

연원

16세기 후반부터 중국에 진출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하느님(Deus)과 가톨릭교회를 표현하는 용어 선택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러다가 중국인들이 본래 천리(天理)를 중시해 왔고, 유학의 경전에 상제(上帝) 즉 하늘의 임금을 섬기는 사천(事天)의 개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동시에 하느님을 천주(天主)로 번역함으로써 상제에 비견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천주라는 용어는 예수회의 루지에리([羅明堅], M. Ruggieri)가 1584년(선조 17)에 펴낸 『조전천주십계(祖傳天主十誡)』와 『천주성교실록(天主聖敎實錄)』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마테오 리치([利瑪竇], M. Ricci)도 『천주실의(天主實義)』 등에서 이 용어를 사용했고, 그의 사후 예수회의 중국 선교 책임자가 된 롱고바르디([龍華民], N. Longobardi)에 이르러 하느님의 호칭이 천주로 통일되었다. 이때부터 천주교(天主敎)는 한자 문화권에서 가톨릭교회를 의미하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내용 및 특징

천주교는 그리스도교[基督敎]의 하나로 로마 교황을 으뜸으로 하는 교회를 말하며, 성격상 동방전교회나 영국 성공회, 프로테스탄트 교회[耶蘇敎] 등과 구분된다. 특히 천주교 즉 가톨릭이란 용어에는 ‘공번[公平]된’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다시 말해 ‘하나인 교회로, 거룩하고 공번되며, 사도로부터 전래된 교회’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천주교에서는 그 교리가 ‘정통 신앙을 전하는 교회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다.

변천

17세기 초 조선에 서학서(西學書)가 유포되기 시작한 이후 천주교는 여러 가지로 표현되었다. 처음에는 서양의 학문이라는 뜻에서 ‘서학’이라 하거나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에서 영향을 받아 ‘서태(西泰: 리치의 호)의 학문’이라고 하였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천주교를 유학에 대비하여 천학(天學)·천주학(天主學)·양학(洋學)이라 하였고, 이단의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사학(邪學)이라고도 하였다.

이후 천주교는 서양의 종교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서교(西敎)나 양교(洋敎), 사학을 믿는 종교라는 의미에서의 사교(邪敎) 등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다만 이때까지 조선에서는 천주교만을 그리스도교로 이해하였다.

조선에서 그리스도교의 여러 갈래들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부터였다. 최한기(崔漢綺)가 『지구전요(地球典要)』에서, 황필수(黃泌秀)가 『척사설(斥邪說)』에서 천주교와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구분한 것이다. 특히 윤종의(尹宗儀)는 『벽위신편(闢衛新編)』을 보완하는 과정에서 천주교와 영국 성공회,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구분해서 설명하였다.

의의

천주교 전래 초기에는 종교적인 측면보다 학문적인 측면에서 더 큰 영향을 주었다. 신문화 수용 운동 과정에서 북학을 탄생시켰고, 화이관(華夷觀)의 극복 등 전통 인식의 변화에 영향을 주었으며, 조선 사회에 새로운 종교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천주교로 인한 갈등은 사옥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탕평책의 소멸과 세도정치를 탄생시키는 요소가 되었다. 동시에 새로운 문화 운동이 좌절되면서 중세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사상 조류까지 사라지고 말았다. 반면에 천주교의 수용은 교회 창설로 이어지고, 이후 조선 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참고문헌

  • 姜在彦, 『조선의 西學史』, 民音社, 1990.
  • 李元淳, 『조선서학사연구』, 一志社, 1986.
  • 趙珖, 『朝鮮後期 天主敎史 硏究』,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 車基眞, 『조선 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 崔韶子, 『東西文化交流史硏究』, 三英社, 1987.
  • 徐宗澤, 『明淸間耶蘇會士譯著提要』, 臺灣: 中華書局, 1947.
  • 吳相湘 編, 『天主敎東傳文獻』, 臺灣: 學生書局,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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