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행선(睦行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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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9(광해군1)∼1661(현종2) = 53세]. 조선 후기 인조~효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행지(行之), 호는 남간(南磵)이다. 본관은 사천(泗川)이고,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호조 참판목장흠(睦長欽)이고, 어머니 의령남씨(宜寧南氏)는 군자감 주부(主簿)남위(南瑋)의 딸이다. 숙부 승지(承旨)목대흠(睦大欽)의 양자로 갔는데, 숙모 진주유씨(晉州柳氏)는 훈련원(訓鍊院)정(正)유해(柳海)의 딸이다. 이조 참판목첨(睦詹)의 손자이고, 관찰사목성선(睦性善)의 동생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30년(인조8)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하고, 1633년(인조11) 식년 문과에 1등으로 장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5세였다. 처음에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좌랑으로 옮겼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고, 이듬해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로 옮겼다. 그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비빈(妃嬪)과 왕자들을 비롯하여 사대부와 서민들이 모두 강화도로 피난하는 데에 그가 모든 일을 주선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전쟁 중에 구하였다. 1637년(인조15) 다시 병조 좌랑이 되어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고,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전임되었다. 그해 말에 홍문관 수찬(修撰)에 임명되었으나, 1638년(인조16) 양부 목대흠의 상을 당하고, 이어 1641년(인조19) 생부 목장흠의 상을 당하였다. 상중이지만 출사하라는 명을 받아 1640년(인조18)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고, 1641년(인조19)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 상례를 모두 끝마치고, 1644년(인조22) 사헌부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홍문관 교리(校理)로 옮겼다. 1645년(인조23) 청나라에서 조선에게 군량미를 급히 공급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기한이 매우 촉박하였다. 이때 헌납목행선이 어사(御史)로 특별히 기용되어 호남 지방의 곡식을 해로(海路)로 청나라에 운송하였다.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되었다가, 이조 좌랑으로 옮겨서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을 겸임하였다. 연안부사(延安府使)로 나갔다가, 3년만에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소환되었고, 이조 좌랑으로 옮겼다가, 홍문관 응교(應敎)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임하였다. 1647년(인조25) 좌승지에 발탁되었고, 이듬해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홍문관 응교가 되었다. 1649년(인조27)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중국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와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병조 참지를 거쳐,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

병자호란 때 경기도 도사 활약

머리가 좋았던 목행선은 일을 맡기면 민첩하고 성실하게 처리하였으므로, 평소 윤이지(尹履之)가 그를 보고 속으로 훌륭한 인재라고 생각하였다. 인조는 경기도도사가 중요한 자리라 하여 재능과 학식이 있는 인물을 선발하려고 하였다. 당시 경기도관찰사였던 윤이지의 추천을 받아 그가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후금(後金) 군사가 도성(都城)을 침공하여 종묘와 사직을 지키지 못할 만큼 위급하게 되자, 먼저 비빈과 왕자들이 강화도로 피난하기로 하였다. 궁중의 사람들과 사대부의 노약자들이 강화도로 들어갔는데, 도사목행선이 거마(車馬)를 마련하고 선척(船隻)을 준비하여 모든 일을 치밀하게 주선하였기 때문에 모두 피난길에 그를 의지하였다.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자, 서울의 대소 서민들이 모두 강화도로 몰려들어 나루터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는 관원과 아전을 동원하여 질서를 바로잡고 차례로 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하였다. 마침 도사의 임기가 차서 사임하려고 하였으나, 후임 관찰사이명(李溟)이 그를 유임시키고 전쟁 중에 굶주리는 피난민들을 진휼하는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전쟁 중에 창칼에 죽는 사람보다 식량을 구하지 못하여 굶어죽는 사람이 더욱 많았는데, 그는 강화도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창고의 환자미[還上穀]를 나누어 주었다. 인조는 강화도에 들어가려다가, 청나라 군사에게 길이 막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서 40일 동안 싸웠다. 『일사기문(逸史記聞)』에는 비좁은 남한산성으로 따라 들어갈 수 없었던 사람들은 모두 경기도도사목행선 등을 찾아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고 전한다. 목행선이 과로로 병이 나서 사직하고자 하였는데, 인조는 그가 일을 싫어하여 일부러 피하는 것이라고 여겨 그를 파직시켰다. 반면에 남한산성으로 따라간 사람들은 모두 호종(扈從)한 공신(功臣)이라 하여 포상했다.

효종 시대 활동

1650년(효종1)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갔으나 1년 만에 중풍에 걸려서 사임하였고, 이듬해 좌승지로 발탁되었다. 1652년(효종3)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병조에서 목행선의 병을 고려하여 군직(軍職)에 제수하려고 하였으나, 효종이 천천히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1653년(효종4)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655년(효종6)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고, 다시 좌승지로 발탁되었다. 이듬해 다시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나갔는데, 이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다. 1659년(효종10) 중풍이 심해져서 관직을 사임하고 다시 벼슬하지 않았다. 군직(軍職)에 있은 지 3년 만인 1661년(현종2) 윤7월 26일 중풍으로 죽으니, 향년이 53세였다.

성품과 일화

목행선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돈독하고 후덕하여 아량이 많았다. 남과 말할 적에는 일찍이 급하게 말하거나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일을 할 적에는 삼가고 치밀하게 하여 이해관계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거나 산업(産業)을 도모하여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았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양주(楊州) 북쪽 이담촌(伊潭村)의 언덕에 있는데, 두 부인이 같이 묻혔다. 미수(眉叟)허목(許穆)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첫째 부인 광주이씨(廣州李氏)는 관찰사이여황(李如璜)의 딸인데, 3남 1녀를 낳았고, 둘째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장령(掌令)윤효영(尹孝永)의 딸인데, 1남 1녀를 낳았다. 차남 목창조(睦昌朝)는 백부인 관찰사 목성선(睦性善)의 후사(後嗣)가 되었고, 4남 목창명(睦昌明)은 문과에 급제하여 참의(參議)를 지냈다. 맏딸은 대사헌유하익(兪夏益)의 처가 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미수기언(眉叟記言)』
  • 『연도기행(燕途紀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일사기문(逸史記聞)』
  • 『잠곡유고(潛谷遺稿)』
  • 『포저집(浦渚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문정공유고(文貞公遺稿)』
  • 『양파유고(陽坡遺稿)』
  • 『용주유고(龍洲遺稿)』
  • 『우복집(愚伏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