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장(偸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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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분산에 불법적으로 묘를 조성하는 일.

개설

조선시대 종법 의식을 바탕으로 성리학적 효 의식이 풍수설과 결합하면서 분묘 수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강화되었다. 이는 조상의 분묘를 명당자리에 조성하려는 묏자리 열풍으로 표출되었고, 그 과정에서 타인의 분산(墳山)을 침해하는 투장(偸葬)이 사회 문제화 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사회는 성리학적 이념에 근거한 종법 질서가 확립되면서 조상의 분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강화되어 갔다. 조상의 분묘를 수호하고 묘역을 단장하는 일이 자손의 도리로 중요시되고 위선사업(爲先事業)의 차원에서 활성화되었다. 특히 16세기 이후 『주자가례(朱子家禮)』의 보급이 본격화되면서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분묘의 풍수를 중요시하였다. 조상과 자손은 기운이 같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택산(擇山)을 잘해 신령이 편안하면 결과적으로 자손이 번성한다고 여겼다. 이는 유교의 효 관념이 풍수설과 결합한 형태로 조선 사회에 묏자리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길지에 대한 열망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분산을 침범하는 투장의 폐단을 야기하였다. 투장은 『주자가례』의 보급이 본격화된 16세기 후반 이래 점차 사회적으로 문제화하였다.

내용

투장은 그 형태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출되는데, 영조는 늑장(勒葬), 유장(誘葬), 투장 등 세 가지 형태를 거론하였다(『영조실록』 3년 3월 20일). 이는 『속대전(續大典)』에 그대로 반영되어 사대부가 늑장(勒葬), 유장(誘葬), 투장하는 것을 각별히 엄금하였다. 이를 어기면 타인의 집을 빼앗아 들어가는 율[閭家奪入之律]에 따라 논죄하고, 해당 고을 수령이 알고서 금지하지 않은 자는 잡아들여 처벌한다고 규정하였다. 여기에서 늑장은 자신의 호강한 세력을 믿고 금장자(禁葬者)를 실력으로 제지하면서 투장을 강행하는 형태이다. 세력형 투장이라 할 수 있다. 분산 주인을 실력으로 제압해야 하기 때문에 현실적, 물리적 힘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때문에 주로 지역의 토호나 유력 사족가에서 행하였고, 향촌 사회에서 읍권을 장악한 향리층도 늑장을 시도하였다. 유장은 분산 주인의 가족이나 친족 등 주변 사람을 꾀어서 투장을 시도하는 형태이다.

이 외에도 암장(暗葬), 승야투장(乘夜偸葬), 평장(平葬) 등의 방식들이 있다. 암장은 분산 주인 모르게 은밀히 투장하는 행위로 개인의 분산뿐만 아니라 왕실의 능원도 빈번하게 백성들의 암장 피해를 겪어야 했다(『숙종실록』 23년 7월 13일) (『영조실록』 40년 3월 5일). 암장할 때에는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하여 일을 추진하다보니 주로 밤 시간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승야투장이라 한다. 인조대 이명(李溟)은 부모와 처를 사족 가옥의 뒤쪽에 승야투장하고 인근에 있는 인가를 철거하여 조정에서 논란에 휘말리기도 하였다(『인조실록』 22년 10월 23일). 평장은 투장한 사실이 발각되지 않도록 봉분을 조성하지 않고 평지처럼 보이게 하는 방식이다. 그 특성상 주로 세력 없는 양반이나 하층민들이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조선후기 금장자의 입장에서 가장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투장 중의 하나는 역장(逆葬)이다. 도장(倒葬)이라고도 하는데, 분묘의 머리 쪽에 해당하는 구역에 투장한 형태이다. 조선전기에는 제약 없이 행해졌으나 종법 의식이 강화되고 풍수설이 성행하면서 점차 금기시 되었다. 중국 사신이 평양의 기자묘를 보고 이는 역장이니 조선에는 반드시 기자의 자손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도 바로 풍수설에 입각하여 화복론(禍福論)을 강조한 해석이었다(『선조실록』 36년 8월 13일). 풍수의 관점에서 볼 때 역장은 주산(主山)에서 분묘로 내려가는 기의 흐름을 단절하는 민감한 위치였기 때문에 거리의 원근에 관계없이 분쟁의 대상이었다. 같은 문중 내에서도 자손이 조상의 머리 쪽에 위치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역장은 두 분묘 사이의 거리에 관계없이 친족 사이에서도 분쟁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국가에서는 17, 18세기를 거치며 투장을 방지하기 위한 법적 규제를 집중적으로 마련하였다. 투장자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의 집을 빼앗아 들어가는 율에 준하여 처벌하였고, 불법적인 투장으로 산송의 폐단을 일으키는 자는 옳고 그름을 논하지 않고 먼저 형추(刑推)하였다. 또한 투장의 피해가 심한 구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주인이 있는 산, 다른 사람의 분산, 큰 마을 안, 인가에서 100보 이내의 지역은 금장 구역으로 지정하여 투장을 엄격히 금하였다. 또한 묏자리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풍수설과 지사(地師)의 폐단을 규제하기 위하여 투장 사건이 발생하면 우선적으로 지사를 잡아들여 형장을 가한 후에 소송을 진행하도록 하였다(『숙종실록』 22년 3월 4일).

이들 일련의 규제들은 수교의 형태로 『수교집록(受敎輯錄)』 「예전」 상장조(喪葬條)와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예전」 산송조(山訟條)에 정리되었고, 이후 『속대전』에 법조항으로 수록되었다.

변천

투장은 국가의 법적 규제에도 불구하고 18, 19세기를 거치면서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며 성행하였다. 국가의 금산(禁山) 구역까지 침범하여 도성의 사산(四山), 능원(陵園), 봉산(封山) 등을 가리지 않고 투장하였다. 일단 투장에 성공하면 투장묘를 파내기 쉽지 않은 상황도 이에 일조하였다. 분묘는 투장묘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손을 댈 수 없고 투장한 당사자가 묘를 파내는 것이 원칙이었다. 때문에 투장자는 산송에서 패소한 이후에도 묘를 파내지 않고 기일을 끌면서 버티는 것이 보통이었다. 투장을 사전에 막지 못하면 투장묘를 파내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또한 투장에는 후속 행위가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투장총을 근거로 재차 삼차 투장을 감행하고, 구역 내의 송추를 투작(偸斫)하였으며, 극단적으로는 투장한 분산을 다른 사람에게 몰래 팔기까지 하였다. 투장의 이러한 특성들은 조선후기 산송을 격화시키고 장기화하는 데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참고문헌

  • 『수교집록(受敎輯錄)』
  •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 『속대전(續大典)』
  • 김경숙, 『조선의 묘지소송』, 문학동네, 2012.
  • 김경숙, 「조선후기 山訟과 사회갈등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 전경목, 「조선후기 산송연구」,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 한상권, 「조선후기 산송의 실태와 성격 : 정조대 上言·擊錚의 분석을 중심으로」, 『성곡논총』27,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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