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장(逆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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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상 거꾸로 조상 무덤 뒤쪽에 후손을 묻는 매장 방식.

개설

풍수지리에서는 조상과 후손의 무덤의 위치를 정할 때 조상이 먼저 돌아가시고 후손이 나중에 죽게 되는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 그리고 용맥이 흐르는 방향에 따라 조상의 무덤이 뒤쪽에, 후손의 무덤이 그 앞쪽에 위치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후손의 무덤을 먼저 쓰고 조상의 무덤을 나중에 조성한 것처럼 후손의 무덤이 조상의 무덤 뒤 쪽에 위치하게 되면 순서를 거슬렀다 하여 역장이라 한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는 음택 풍수지리에 대해 전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무덤의 위치를 매우 중시했다. 조상의 무덤이 놓인 위치가 길지 여부에 따라 집안의 전도와 미래가 달라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원래 자연 지형의 범위와 위치의 제약으로 인해 풍수지리 길지는 찾기도 쉽지 않고 매우 제한적이다. 그런데 한 집안을 일으킨 근본 원인이 어떤 조상 무덤의 위치가 좋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집중하게 되면, 그 후손이 죽었을 때 다른 곳에 묻어서 결과의 좋고 나쁨을 확신할 수 없는 것보다, 기존의 명당 터로 보이는 조상 무덤 근처에 묻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조상 무덤 앞쪽에 더 이상의 여유 공간이 없을 때는 부득이 뒤쪽에 무덤이 조성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역장을 했던 것은 왕릉의 경우 보이지 않으며, 역장에 대한 언급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은나라의 신하였던 기자(箕子)의 묘가 역장이었다는 언급만 있다(『선조실록』 36년 8월 13일). 그런데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유학자들의 경우, 역장을 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로는 신사임당(申師任堂)과 그 아들인 율곡(栗谷)이이(李珥)의 무덤, 예학의 종장이라고 하는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과 그 조모의 무덤, 광해군 시기 대학자이자 정치가로 유명했던 포저(浦渚) 조익(趙翼) 선생과 그 부친의 무덤 등이 있다. 이런 역장은 그 형국이 퉁소형인 경우에 쓰인다. 퉁소는 엄지손가락이 아래쪽 구멍을 막고 나머지 손가락이 위쪽 구멍을 막기 때문에, 이런 경우 조상 무덤이 아래로, 후손 무덤이 위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율곡 이이의 선산이 대표적인 예이다.

참고문헌

  • 장성규, 「『朝鮮王朝實錄』의 風水地理文獻 硏究 -『靑烏經』·『錦囊經』·『狐首經』을 中心으로 -」,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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