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궤(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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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이나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후세에 참고하도록 하기 위해 그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과를 기록한 책.

개설

의궤(儀軌)는 의식(儀式)의 궤범(軌範)을 뜻하는 용어이다. 왕실이나 나라에 주요한 행사가 있을 때 행사를 치르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절차와 비용 및 진행 과정 등 모든 과정을 세밀하게 기록한 보고서로 이후의 행사에 참고할 수 있도록 제작하였다. 새로 추가할 것이 있을 때에는 자세한 내용을 추가하였다.

의궤의 전담 기구인 의궤청에서는 행사의 논의 과정부터 행사가 완료될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기록하는데, 행사의 주요 장면이나 건축물, 행사에 필요한 물품들을 도설(圖說) 또는 간단한 그림[圖式]의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즉 그 행사에 대한 종합 보고서로서 국가 행사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왕실과 나라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는 기존의 사례를 참고하여 거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였다. 나라의 행사를 거행할 때 기존 기록으로는 각종 행사를 원만하게 집행하기에 무리가 있어 세밀한 부분들에 대한 기록들이 필요했다. 행사에 동원된 인원의 명단과 신상 자료, 행사에 사용된 각종 물품의 규격과 수효, 재료, 색채, 가격 등에 대한 상세한 내용들을 담아 해당 의식에 필요한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의궤는 이와 같은 의식의 과정에 대한 기록으로, 때로는 당시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기록화라고 할 수 있는 상세한 도설을 함께 싣기도 하였으며, 궁궐이나 성곽 건축에 대한 기록에는 건물의 설계도와 함께 건축에 사용된 물품과 비용, 재료의 구입처, 시공 과정에 사용되었던 기구에 대한 도설도 함께 제시하였다.

의궤를 작성하는 절차는 왕의 혼인을 비롯한 왕실의 혼례, 세자 책봉, 왕실의 장례, 궁궐의 건축 및 나라나 왕실의 중요한 행사가 완료되었을 때 곧바로 전담 기구인 의궤청을 설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행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논의한 과정부터 행사가 완료된 과정까지 소요된 것들에 대한 기록들을 모두 갖춘 후 의궤를 작성하여 왕과 관련 기관에 보고함으로써 행사의 전 과정이 완료되었다.

의궤의 편찬은 시기적으로는 조선 건국 직후부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까지 계속되었다. 고려시대에 의궤를 편찬한 사실은 확인할 수 없으며, 조선시대에는 태조대에 처음 편찬하였다. 그때 작성된 것으로는 정도전(鄭道傳)·민제(閔霽)·권근(權近) 등이 제조로 참여하여 찬수한 종묘의 제사 때 행했던 무일(舞佾), 즉 춤에 관한 의궤가 있으며, 1395년(태조 4) 경복궁을 창건하면서 건설 과정을 기록한 『경복궁조성의궤』가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의궤가 계속 편찬되었으나 의궤 편찬의 주체는 도감에서 이왕직(李王職)의 주감(主監)으로 전락하였고, 국장(國葬)도 어장(御葬)으로 격하되었으며, 의궤의 수량도 분산의 필요가 없어져 3건 이내로 줄어들었다. 일제강점기에 편찬한 의궤는 엄비(嚴妃), 고종(高宗), 순종(純宗)의 장례식과 관련된 의궤 및 이왕직의 제사와 관련된 의궤들이다.

현존하는 의궤는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만들어졌다. 그중 가장 오래된 의궤는 1601년(선조 34)에 작성된 의인왕후(懿仁王后)와 관련된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와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이다. 이 의궤들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행사가 결정되면 곧바로 의식을 주관하는 임시 관청인 도감이 설치되고, 그에 따라 책임자 및 실무자들이 참여하여 의궤 편찬이 이루어졌다. 도감은 책임자급으로 도제조, 제조 등이 임명되고, 그 밑에 여러 명의 낭청이 소속되어 실무를 맡았다. 도감은 하부 집행 기관인 일방(一房), 이방(二房), 삼방(三房), 별공작(別工作) 등을 두어 업무를 분장하였다. 의궤를 편찬할 때에는 최고 책임자로 의궤당상을 임명하고, 그 밑에 실무 책임자로서 몇 명의 낭청을 두었으며, 낭청 밑에 필사를 담당하는 서사관을 두었다.

의궤의 체제는 시대나 행사의 내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어서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으나, 『원행을묘정리의궤』를 기준으로 삼았을 때, 앞부분에는 택일(擇日), 각항일자(各項日子), 좌목(座目), 도식(圖式) 을 실었다. 택일과 각항일자는 행사의 중요한 진행을 날짜에 따라 기록하였고, 좌목은 도감의 관원 명단, 도식은 행사의 주된 내용과 행사에 필요한 물품, 반차도(班次圖)를 포함한 주요한 장면들을 기록하였다. 다른 의궤의 경우 도식 중에서 설명이 필요하면 도설의 명칭을 붙여 의식에 쓰인 주요 도구들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도 있다.

그다음으로 왕의 전교(傳敎)·연설(筵說)·악장(樂章)·치사(致詞)·어제(御製)·어사(御射)·전령(傳令)·군령(軍令) 등의 항목이 있다. 전교는 왕의 명령, 연설은 행사와 관련한 신하들과의 대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악장은 행사와 관련된 음악, 어제는 치제문(致祭文)을 비롯하여 고유문(告由文), 전작문(奠酌文) 등을 실었다. 그다음은 의주(儀註)·절목(節目)·계사(啓辭)·계목(啓目)·이문(移文)·내관(來關)·수본(手本)·감결(甘結) 등의 항목이 있다. 이 중 절목은 행사와 관련한 절차 및 각각의 역할을 규정하고 있으며, 그 밖의 항목들은 관청 간의 업무 협조를 위해 오고간 문서들을 종류별로 기록하였다.

찬품(饌品)·기용(器用)·배설(排設)·의장(儀杖)·반전(盤纏)·장표(掌標)·가교(駕轎)·주교(舟橋)·사복정례(司僕定例) 등의 항목에서는 행사에 필요한 인원과 세부적으로 사용되는 물품을 기록하였으며, 특히 사복정례에는 행사에 참여한 원역(員役)에 지급하는 비용을 자세히 적었다.

그다음은 내외빈(內外賓)·참연노인(參宴老人)·배종(陪從)·유도(留都)·공령(工伶)·당마(塘馬)·방목(榜目) 등의 항목으로, 이는 연회의 행사에 참여했거나 동원된 자들에 대한 기록이다. 이 중 유도는 왕이 행차할 때 맞을 군인들의 명단과 역할들을 기록하였고, 공령은 진찬(進饌)악사(樂師)·악공(樂工)·악생(樂生) 등으로 참여한 자들의 복장 및 역할 등을 기록하였는데, 그중에는 한성부의 기생을 비롯하여 여령(女伶)들의 역할 및 나이도 기록되어 있다.

당마는 척후의 임무를 띤 자로서 말을 타고 다닌 자들에 관한 기록이며, 방목은 화성에서 베푼 문과별시와 무과별시 등에 합격한 자들의 명단과 함께 합격한 지 60년이 지난 자들, 즉 회방(回榜)한 자들의 명단이 실려있다.

그다음은 상전(賞典)·재용(財用)의 항목이다. 상전은 가교를 조성한 자들을 비롯하여 연회가 이루어지도록 행사에 참여한 자들에 대한 시상 기록이고, 재용은 행사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고 그에 따라 지급된 것들에 대한 내용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행사에 따라 특별히 설치된 항목들이 있으나, 의궤에 기록된 내용은 크게 행사에 참여한 주체 및 행사에 도움을 준 자들의 명단, 행사의 진행 과정, 왕과 신하들 간의 의견 조율 및 관청 간의 업무 협조 과정, 행사에 사용한 물품과 행사에 동원한 인원 및 비용, 행사 공로자에 대한 시상, 행사의 모습을 담은 도식 또는 도설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의궤 중에는 도설이나 도식이 없는 것도 있다.

의궤는 어람용으로 1건, 의정부·예조·춘추관·강화부·태백산사고·오대산사고·적상산사고 등에 각 1건씩 모두 9건 내외를 작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의궤에 따라서는 작성 건수가 일정하지 않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왕명에 따라 혜경궁, 규장각, 외규장각, 사고(史庫), 화성행궁, 현륭원, 정리소, 승정원, 홍문관, 시강원·비변사·장용영·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호조·예조·병조·사복시·경기감영·화성부·광주부·시흥현·과천현 등 27개의 국가 기관에 1건씩 배포하였고, 총리대신을 맡은 채제공(蔡濟恭)을 비롯하여 행차에 참여했던 31명의 대신들에게도 1건씩 하사하여 모두 58건을 간행하였다. 이는 다른 의궤에 비해 많이 간행한 사례로, 이렇게 많이 간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의궤로는 처음으로 제작된 활자본이었기 때문이다.

의궤의 종류는 행사의 목적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왕이나 세자의 혼례, 왕·세자·왕비 등의 책봉 및 책례(冊禮), 국장 및 빈전(殯殿)·혼전(魂殿)·부묘(欖廟) 등의 의절(儀節), 산릉(山陵)·묘소의 축조, 선대 왕과 왕비 등에 대한 존호의 가상(加上) 또는 추상(追上), 궁전이나 능원(陵園)의 축조·개수, 『조선왕조실록』이나 『국조보감』 또는 법전의 찬수, 『선원보』의 수정, 공신의 녹훈, 어진(御眞)·영정(影幀)의 도사(圖寫), 친경(親耕)·진연(進宴)의 의식 등 종류가 다양하다.

현재 전하는 의궤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546종 2,700여 건,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에 294종 369건, 프랑스파리국립도서관에 191종 297건, 일본궁내청에 71종, 영국대영도서관에 1종이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도 『원행을묘정리의궤』가 다수 간행되어 기관이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변천

조선시대 어람용 의궤는 녹색 또는 푸른색 비단으로 표지를 꾸미다가 1897년(광무 1)에 대한제국이 성립하면서 황제가 보기 위한 의궤는 황색 비단으로, 황태자가 보기 위한 의궤는 붉은색 비단으로 표지를 꾸몄다. 제후에서 황제로 격을 올리면서 형식적인 면도 달라졌는데 초주지, 붉은 인찰선, 변철(邊鐵), 박을 못을 사용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고종이 태황제(太皇帝)로 물러나고 순종이 즉위하면서 태황제용 의궤가 제작되어 어람용이 모두 3건으로 늘어났다. 의궤의 분산처도 늘어나 예조 대신에 장례원 또는 예식원, 춘추관 대신 비서원 또는 비서감이 등장하였고, 그에 따라 의궤 편찬도 8건 내지 12건으로 늘어났다.

의의

의궤는 조선시대 국가적인 행사에 대한 제도의 정비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당대에 이루어지고 있는 제도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변화된 제도에 대해서는 추가하여 기록함으로써 후대에 기록을 전하는 구실도 하였다.

이는 유교 정치의 이념 아래 이루어지는 국가적인 행사나 왕실의 행사를 명확한 절차에 따라 진행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며, 조선 왕실의 기록 문화에 대한 태도와 인식이 매우 높았음을 보여준다. 의궤는 한국학 관련 부문 가운데서도 정치, 경제, 문화, 건축 미술, 국어 및 용어, 과학 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참고문헌

  • 『숙종기해진연의궤(肅宗己亥進宴儀軌)』
  •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
  • 『영종대왕실록청의궤(英宗大王實錄廳儀軌)』
  •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
  • 『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
  • 김문식·신병주 편, 『조선 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 박병선 편, 『조선조의 의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 서울대학교 규장각, 『규장각 소장 의궤 종합목록』,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2.
  • 이성미·강신항·유송옥, 『장서각소장 가례도감의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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