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묘도감(遷墓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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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왕실의 ‘묘’를 옮기는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관청.

개설

천묘도감은 조선시대에 단 두 번 설치되었다. 첫 번째는 1496년(연산군 2)에 연산군이 성종의 계비이자 자신의 생모인 폐비 윤씨를 복위하고 묘를 옮기도록 지시하였는데(『연산군일기』 2년 윤3월 13일), 그에 따라 천묘도감이 설치되었다.

두 번째는 1718년(숙종 44)에 소현세자의 빈 강씨를 복위하고 묘소를 정비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소현세자의 묘로 옮겨 합장하기로 함에 따라 천묘도감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다시 기존의 묘에 봉묘(封墓)하기로 결정하면서 천묘도감은 혁파되었다(『숙종실록』 44년 8월 28일).

연산군대의 천묘도감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묘(墓)를 서둘러 천장(遷葬)하려 하였으나, 성종의 삼년상이 끝난 뒤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祔廟)를 기다려 장소를 찾기로 하고 일단 미루었다(『연산군일기』 2년 윤3월 14일). 그런데 연산군은 천묘(遷墓)뿐 아니라, 사당을 지어 제사를 모시려고도 하였다. 하지만 신하들이 윤씨의 묘를 추숭하지 말라는 성종의 유지를 들어 극렬히 반대함에 따라 결국 의논만 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연산군일기』 2년 8월 20일) (『연산군일기』 2년 8월 21일) (『연산군일기』 2년 8월 22일).

그나마 윤씨의 묘를 옮기는 일은 진행되어, 1497년(연산군 3)에는 군사를 보내 묘에 쓸 돌을 캐게 하였으며 묘의 석물 등은 능실의 제도에서 감하여 간략하게 설치하도록 결정하였다(『연산군일기』 3년 1월 10일) (『연산군일기』 3년 1월 17일). 이 무렵을 전후해 천묘도감이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구체적인 조직과 활동 내용을 알기는 어렵다. 다만 제조(提調)는 이세좌(李世佐)와 윤효손(尹孝孫)이었다(『연산군일기』 3년 1월 11일). 같은 해 3월에는 지관최호원(崔灝元)의 건의에 따라 새 묘소 근처에 못을 팠다(『연산군일기』 3년 3월 13일).

연산군대에 설치된 천묘도감은 그 설치 시기가 명확하지 않고, 천묘의 내용도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전후의 정황으로 미루어, 경기도 장단(長湍)에 있던 폐비 윤씨의 묘(『성종실록』 19년 4월 17일)를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에 위치한 회묘(懷墓) 터로 옮기는 일을 맡아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숙종대의 천묘도감

1718년(숙종 44)에 민회빈묘를 추봉하는 과정에서 도감의 명칭이 천묘도감으로 바뀌었을 때, 도감의 조직은 도제조(都提調)와 제조 2명, 도청(都廳), 낭청(郎廳)이 1, 2, 3방으로 나뉘었으며 각 방의 감조관(監造官)은 4명으로 구성되고, 별공작과 지석소(誌石所)가 추가되었다. 도제조는 행판중추부사김창집(金昌集)이, 제조는 이조 판서권상유(權尙游), 예조 판서김흥경(金興慶)과 그 뒤를 이어 좌참찬민진후(閔鎭厚)가 맡았다. 천묘도감이 유지된 기간은 1718년 5월 21일에서 8월 28일까지였다.

변천

관련 사항

1504년(연산군 10)에 연산군은 천묘가 무산된 윤씨의 회묘(懷墓)를 회릉(懷陵)으로, 사당인 효사묘(孝思廟)를 혜안전(惠安殿)으로 승격시키고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로 추존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3월 23일) (『연산군일기』 10년 3월 24일) (『연산군일기』 10년 3월 25일) (『연산군일기』 10년 4월 1일). 묘의 석물도 왕릉과 같은 형식으로 조성하였으나, 1506년(연산군 12)에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회릉은 다시 회묘로 강봉되었다. 회묘는 1969년에 서삼릉 내의 귀인·숙의 묘역 뒤쪽으로 이장되었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민회빈봉묘도감의궤(愍懷嬪封墓都監儀軌)』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능묘』,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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