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릉(穆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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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博氏) 및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金氏)의 능.

개설

선조와 의인왕후 및 인목왕후가 묻힌 산릉으로,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健元陵)의 경내에 있다. 오늘날의 목릉은 1600년(선조 33)에 의인왕후가 승하하자 건원릉 동쪽에 묻고 유릉(裕陵)이라 불렀던 곳을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선조의 능인 목릉은 선조가 승하할 당시인 1608년(광해군 즉위)에는 건원릉의 서쪽 길지에 조성되었다. 그러나 주변에 물기가 차고 지리상 좋지 않다는 상소가 있어 1630년(인조 8)에 의인왕후의 능 서남쪽으로 옮기고 능호를 합쳐 목릉이라 칭하였다.

1632년(인조 10)에 계비인 인목왕후가 승하하자 그 무덤을 동남쪽에 만들고 혜릉(惠陵)이라 불렀는데, 영역이 같으므로 세 능을 통틀어 목릉이라 부르기로 결정했다. 이후에도 종종인목왕후의 능을 따로 혜릉이라 칭하였으나, 1720년(경종 즉위)에 경종의 세자 시절 부인이었던 단의빈(端懿嬪)심씨(沈氏)를 단의왕후(端懿王后)로 봉하고 그 능호를 혜릉으로 정하면서부터는 더 이상 목릉과 구분하지 않게 되었다(『경종실록』 즉위년 6월 15일).

조성 경위

1600년(선조 33)에 의인왕후가 승하했을 때, 처음에는 산릉 터를 포천(抱川)의 신평(新坪)으로 정하였다. 공사가 이미 절반을 넘어섰으나 터가 불길하다는 술관(術官)박자우(朴子羽)의 상소에 따라 오늘날의 위치로 옮겨 산릉을 조성했다.

선조의 무덤은 1608년(광해군 즉위)에 조성되었는데, 건원릉 주변 모든 언덕의 지리를 살핀 결과 건원릉 서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당시에 산릉의 정혈(正穴)이 서쪽으로 금방(金方)에 해당하고 선조가 태어난 해는 목(木)에 속하기 때문에, 그 터에 장사를 지내면 자손이 9년 안에 병을 얻어 죽게 된다는 설이 있었다. 물론 대신들의 반대에 의해 이는 묵과되었고, 결국 그 자리에 목릉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목릉이 조성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병풍석 등의 석물이 점점 무너지고 기울어지는 등 문제가 계속되었고, 이를 고치기를 반복하던 중 1830년(인조 8)에 원주목사심명세(沈命世)가 상소를 올려 천장(遷葬)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해 11월, 천릉도감(遷陵都監)을 설치하여 선조가 살았을 때 점찍어 두었던 자리로 천장하였다. 다시 1632년(인조 10)에 인목왕후를 같은 영역 내에 안장하고 세 능을 합쳐 목릉이라 칭하기로 하고는, 중간 지점에 정자각을 설치하여 함께 사용하도록 했다(『인조실록』 10년 8월 14일).

조성 상황

목릉의 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현궁(玄宮)은 모두 회곽분(灰槨墳)으로 조성되었다. 능상의 봉분은 그 바깥쪽으로 난간석을 두르고 뒤쪽에는 곡장(曲墻)을 설치했으나, 선조의 무덤만은 병풍석과 상석이 봉분을 감싸고 있다. 봉분의 사방에 양석과 호석 각 4구씩을 놓은 것, 봉분 상계(上階)에 혼유석과 망주석 1쌍을 설치하고, 중계(中階)에 석등과 문인석, 마석 1쌍씩을, 하계(下階)에 무인석과 마석 1쌍씩을 배치한 것 등은 세 무덤이 모두 동일하다. 정자각은 하나만 있는데, 정청(政廳)이 3칸, 배위청(拜位廳)이 2칸이며 맞배지붕이다. 표석을 보호하기 위한 비각도 1칸짜리 하나뿐인데, 영조 연간에 건립된 것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변천

1865년(고종 2)과 1868년(고종 5)에 폭우로 많은 능들이 피해를 입었는데, 이때 목릉도 곡장과 봉분이 손상을 입어 수리하게 되었다. 1879년(고종 16)에는 동구릉을 일제히 정비하면서, 목릉의 비각과 정자각을 수리하여 두 건물 모두 좌우와 후면 벽체를 화방벽으로 바꾸었다.

관련 사항

동구릉의 하나로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다른 조선 왕릉과 함께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