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혈(正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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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룡(正龍)의 중심 기맥을 이어받아 이루어진 바른 혈처(穴處).

개설

혈처를 취해 쓸 때는 그 자리가 바른지 치우쳤는지를 우선 판단하는데, 그 관건은 혈처의 중심에서 출맥해서 결혈한 것인지의 유무를 보는 것이다. 만약 그 조건에 충족된 자리이면 그것은 제대로 된 혈처라는 의미에서 정혈로 된 길지로 본다. 풍수지리에서는 활용하고자 하는 장소가 정혈인지 아닌지에 따라 인사의 길흉이 달라진다고 보기 때문에 형세론의 요건을 제대로 갖춘 곳, 즉 정혈을 귀하게 여긴다.

내용 및 특징

정혈은 그것이 와혈(窩穴)이건, 겸혈(鉗穴)이건, 돌혈(突穴)이건 간에 그 형태에 상관없이 중심에서 나온 용맥(龍脈)이 물이 싸고 감아 도는 수류의 환포를 앞에 두고 멈추어서 생기를 잘 갈무리하고 있는 혈처이다. 풍수지리에서 정혈은 사람의 빈부(貧富)·귀천(貴賤)·현우(賢愚)·수요(壽夭)를 결정짓는 막강한 영향력이 있다고 보고, 정혈 여부를 매우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장서(葬書)』에 따르면 정혈의 요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먼저 정룡의 세를 타고 천리만리의 먼 거리를 단절 없이 내려온 산자락에 맺힌 바른 형국, 전후좌우의 산들이 조밀하게 둘러 싸 장풍이 된 장소, 수류가 환포한 득수지, 산의 배면이 아니라 앞쪽의 생기 충만한 곳이어야 하고, 치우치거나 한쪽이 패였거나 용맥이 잘렸거나 험한 암석이 많거나 기맥이 심하게 약하거나 아예 없거나 지나치게 한랭한 폐단 등이 없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또 정혈이 제대로 활용되려면 방위와 택일의 요건도 갖추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변천

『조선왕조실록』에서 정혈은 1444년(세종 26)에 처음 보이는데, 어효첨(魚孝瞻)이 지리서를 참고하여 수릉(壽陵)의 정혈을 정하였다 하였다(『세종실록』 26년 12월 21일). 단종대에 목효지(睦孝智)는 헌릉(獻陵)의 내맥은 정룡이 아니며 쓸 자리 또한 정혈이 아니라 가짜 혈인 가화(假花)라는 상소를 올렸다[『단종실록』 즉위 6월 5일 2번째기사]. 이 가화는 현종대에는 화가(花假)로 사용되었다[『현종실록』 즉위 5월 23일 1번째기사]. 세조대에는 진혈(眞穴)을 동의어로 사용하고, 화혈(花穴)을 반의어로 사용한다(『세조실록』 10년 9월 7일). 연산군, 중종, 명종, 선조, 인조, 현종, 영조시기에는 정혈의 원뜻 그대로 사용하여 풍수지리의 형세론에 비추었을 때 그에 마땅한 장소를 정혈이라 하였다(『연산군일기』 1년 1월 10일)(『중종실록』 25년 9월 17일)(『선조실록』 33년 7월 25일)(『인조실록』 8년 5월 2일)[『현종실록』 즉위 7월 2일 2번째기사].

그런데 광해군대에는 잠시 방위와 망인의 생년의 간지를 대비시켜 오행의 상생상극론으로 정혈을 설명하였고, 순조대에도 방위와 연관시켜 정혈의 형세와 함께 방위도 하나의 요건으로 다루고 있다[『광해군일기』 즉위 3월 15일 4번째기사][『순조실록』 즉위 7월 13일 4번째기사].

참고문헌

  • 김두규, 『풍수학사전』, 비봉출판사, 2005.
  • 이돈직 역해, 『천고비전 풍수지리학 설심부 역해』, 도서출판 예가, 2001.
  • 장성규·김혜정, 『완역 풍수경전』, 문예원, 2010.
  • 장성규, 「『朝鮮王朝實錄』의 風水地理文獻 硏究 -『靑烏經』·『錦囊經』·『狐首經』을 中心으로 -」,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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