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종(華嚴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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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대 11개 또는 7개 불교 종파 중 하나로,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교종의 대표적 종파.

개설

화엄(華嚴)은 통일신라시대에 유식(唯識) 사상과 함께 불교 교학을 대표하였고 의상(義湘)을 계승한 의상계가 주류를 이루었다. 고려시대에는 법상종(法相宗)과 더불어 교종의 양대 종파를 이루었고 오교양종의 하나로서 조선초까지 이어졌다. 세종대에 화엄종은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시흥종(始興宗)과 함께 선교양종의 교종으로 통합되었다. 조선 중종대 이후 불교 종파는 더 이상 공인되지 않았지만 조선후기에도 화엄학은 매우 성행하여 유구한 교학 전통이 계승되었다.

설립배경 및 연원

화엄종은 『화엄경』과 화엄교학에 근거한 교종 종파로서 법상종과 함께 고려시대 교종의 양대 종파였다. 7세기에 활동한 의상이 중국 화엄종의 2조 지엄(智儼)에게 수학하고 돌아와 부석사(浮石寺)을 창건하고 제자들을 양성한 것이 해동화엄의 시작이다. 고려시대에도 균여(均如)와 대각(大覺) 국사(國師)의천(義天) 등이 활약하면서 중앙 불교계를 주도하였고 화엄사상의 계승과 발전이 이루어졌다. 고려시대 오교양종의 오교는 대체로 교종 계통의 계율(戒律), 법상(法相), 법성(法性), 원융(圓融), 열반(涅槃)으로 보는데, 화엄종은 이 중 원융에 해당한다. 하지만 무인정권 이후 조계종(曹溪宗)으로 대표되는 선종이 불교계의 주류 세력으로 부상하면서 화엄종의 교세는 크게 약화되었다. 이어 조선 왕조가 개창되고 숭유억불을 정책적 기조로 삼으면서 화엄종은 선교양종의 교종에 통합되었다.

내용 및 변천

조선 태종대에는 국가에서 공인한 11개의 불교 종파가 다시 7개로 축소되었고 세종대에는 선종과 교종의 양종으로 통합되면서 화엄종도 교종에 편입되었다. 조선 개국 후 불교에 대한 억불 정책이 가시화된 것은 태종대에 들어서였다. 1402년(태종 2)에는 선종과 교종의 여러 불교 종파들을 대표적 종파인 조계종과 화엄종으로 합치고 서울 밖 사찰 중 70개소를 두 종에 나누어 소속시키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2년 4월 22일). 이어 1406년(태종 6)에는 국가에서 공인한 11개 종파 242개 사사(寺社)에 대해서 소속 토지와 노비의 소유를 인정하였고, 그 외의 사원에서 사사전(寺社田) 3~4만결, 사사노비(寺社奴婢) 8만명을 속공하였다. 당시 화엄종에는 도문종과 합쳐 총 43개소의 사찰이 배정, 공인되었다(『태종실록』 6년 3월 27일).

다음 해인 1407년에는 공인된 종파 수가 다시 7개로 축소되었다. 7개 종파는 화엄종과 조계종, 자은종과 천태종(天台宗), 그리고 중신종(中神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이었다. 조선초에는 고려시대의 4대 종파였던 화엄종, 법상종(자은종), 조계종, 천태종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고 소승종(小乘宗)을 포함해 모두 12개 종파명이 확인된다. 한편 7개 종파로의 축소 통합을 단행하면서 앞서 지정된 242개의 사찰 가운데 자복사(資福寺) 88개가 산중의 명찰(名刹)로 대체되었다.

화엄종에는 장흥(長興)금장사(金藏寺), 밀양(密陽)엄광사(嚴光寺), 원주(原州)법천사(法泉寺), 청주(淸州)원흥사(原興寺), 의창(義昌)웅신사(熊神寺), 강화(江華)전향사(栴香寺), 양주(襄州)성불사(成佛寺), 안변(安邊)비사사(毗沙寺), 순천(順天)향림사(香林寺), 청도(淸道)칠엽사(七葉寺), 신령(新寧)공덕사(功德寺)의 11개 사찰이 새로 지정되었다(『태종실록』 7년 12월 2일).

세종대인 1424년(세종 6)에는 기존 불교 종파들을 선종과 교종의 양종으로 통합한 선교양종 체제가 출범하였다. 이때 화엄종은 자은종, 중신종, 시흥종과 함께 교종에 편입되었다. 또 고려시대부터 승려 인사와 사찰 관리를 주관해 온 기관인 승록사(僧錄司)가 폐지되고 선교양종 도회소(都會所)가 서울의 흥천사(興天寺)흥덕사(興德寺)에 각각 두어졌다. 당시 선종과 교종 각 18개씩 합쳐서 36개의 사찰이 공인되었고 허용된 승려 수는 선종 1,950명, 교종 1,800명의 총 3,750명, 보유 사원전은 선종 4,200여 결, 교종 3,700결로 합쳐서 7,900여 결이 인정되었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이후 명종대인 16세기 중반에 선교양종이 일시적으로 재건되기도 했지만 중종대에 선교양종이 혁파되고 『경국대전』의 도승(度僧) 관련 조항이 삭제되면서 국가에서 인정하는 공식 종파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전기 선교양종 체제에서 교종 승과(僧科)의 시험 교재는 『화엄경』과 『십지론(十地論)』이었고, 조선후기에도 승려 교육 과정의 최고 단계인 대교과(大敎科)에 『화엄경』이 들어가는 등 교학에서 차지하는 화엄의 위상은 줄지 않았다.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강원(講院)에서 화엄강학이 매우 중시되었고 주석서인 사기(私記)가 다수 찬술되는 등 교학을 대표하는 화엄학 전통은 면면히 계승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 「흥왕사대각국사묘지명(興王寺大覺國師墓誌銘)」
  • 김갑주, 『조선시대사원경제연구』, 동화출판, 1983.
  • 김영수, 『조선불교사고』, 중앙불교전문학교, 1939.
  •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임제법통과 교학전통』, 신구문화사, 2010.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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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 忽滑谷快天, 『朝鮮禪敎史』, 春秋社,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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