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사례(鄕射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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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향촌에서 유교 의례의 하나로 행하던 활쏘기 의식.

개설

유교 사회였던 조선왕조는 서울에서는 왕이 참여하는 대사례(大射禮)를, 전국의 지방에서는 개성부 및 각 주부군현(州府郡縣)의 수령이 참여하는 향사례(鄕射禮)를 실시하였다. 향사례의 절차는 원칙적으로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각 고을에서 효제충신(孝悌忠信)하고 예의에 밝은 자를 주빈으로 삼아서, 학당(學堂) 근처에 단(壇)을 만들고 90보 거리에 과녁을 세운 후에 시행하였다. 향사례는 단순히 활을 쏘는 기예를 뽐내는 행사가 아니라, 선비들이 정지(正志)하는 예(禮)와 연고덕행자(年高德行者)를 존숭함으로써 향촌의 질서와 안정을 이루려는 의도가 깔린 향촌 교화 의식의 하나였다.

연원 및 변천

향사례는 본래 중국 주나라에서 행하던 제도로서, 향대부(鄕大夫)가 향촌의 어진 사람들을 선발하기 위해 행하던 활쏘기 의식이었다. 『의례(儀禮)』의 향사례조에는 주장(州長)이 봄가을에 예법에 따라 백성을 모아 지방 학교인 주서(州序)에서 활쏘기를 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러한 향사례와 함께 거론된 것이 ‘향음주례(鄕飮酒禮)’이다. 여기서 향사례가 군신(君臣)의 의리를 밝히는 것이라면, 향음주례는 장유(長幼)의 질서를 밝히는 것, 즉 음주(飮酒) 등의 순위를 나이·덕행·도예(道藝)의 순서에 따라 정하는 사대부 사이의 관계에 중심을 두었다.

『주례(周禮)』의 사도교관직(司徒敎官職)조에는 지방을 향(鄕)·주(州)·당(黨)·족(族)·여(閭)·비(比) 등으로 나누었는데, 그중 주에서 행한 의례를 향사례로 규정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즉 향의 장인 향대부가 정월에 사도(司徒)로부터 국가의 법을 받아 주장에게 전하면, 주장은 정월 중에 길일을 택해 향사례를 행했다고 한다. 이때 향사례의 사(射)는 ‘정기지(正其志)’라 하여, “그 뜻을 바르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기(禮記)』에 따르면, 제후의 사는 대사(大射), 향대부의 사는 향사(鄕射)라 했다. 향사례는 향대부가 3년마다 어질고 재능 있는 사람을 추천할 때 실력을 가리기 위해 행하는 활쏘기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와 같이 향사례는 고대 중국의 인재 선발 방법의 하나로 발전해오면서, 군신의 의리를 밝히는 동시에 선비의 뜻을 바르게 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우리나라에 향사례가 처음 도입된 것은 조선왕조에 들어와서인데, 이는 고려후기에 성리학이 전래되면서 유교 의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향사례에 대한 기록은 세종 때 처음으로 나타난다. 1433년(세종 15)에는 왕이 술의 해로움을 경계하는 자리에서, 향사가 친목을 가르치기 위한 의식임을 처음 밝히고 있다.

그 후 조선왕조가 국가전례서인 『세종실록(世宗實錄)』「오례(五禮)」를 마련하는 자리에서 향사의(鄕射儀)는 대사에 해당하는 관사우사단의(觀射于射壇儀)와 함께 군례(軍禮)의 하나로 정비되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서울에서는 왕이 신하들과 함께하는 관사우사단의를 거행하고, 각 도의 주부군현에서는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 두 차례에 걸쳐 수령의 주관 아래 선비들이 참여하는 향사의를 거행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향사례가 군례의 하나로 정비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왕조가 향사례를 단순한 향촌 교화의 수단으로서 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무비(武備)를 도모하는 의식으로 인식했음을 말해준다. 이는 같은 향촌 교화의 목적으로 채택된 향음주례가 가례(嘉禮)에 포함된 것과도 차이가 난다. 『세종실록』「오례」의 향사와 관련한 규정은 세조대를 거쳐 성종대인 1494에 완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그대로 확립된다.

그러나 규정은 마련되었지만 향사의는 곧바로 시행되지 않았는데, 이는 유교 의식이 아직 향촌 사회에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성종대부터 이미 마련된 유교 의례의 시행을 논의하기 시작하여, 1479년(성종 10) 중앙에서 대사례나 양로연을 시행한 것처럼 『국조오례의』에 의거하여 향사례와 향음주례를 실시하게 하였다(『성종실록』 10년 1월 20일).

당시 조정에서는 규정이 마련되어 있음에도 지방의 수령들이 이를 시행하지 않자 유수와 관찰사로 하여금 권장토록 하였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각 지방에서 서서히 향사례를 시행하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이 선산부사로 재직할 때에, 향사례와 향음주례를 시행하되 향사례에 효제(孝悌) 있는 자를 먼저 하고, 그다음으로 재예(才藝) 있는 자를 참여하며, 불초한 자는 참여하지 못하게 한 결과 풍화(風化)에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김종직과 김일손(金馹孫) 등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는 『주례』의 향사례와 향음주례의 실천을 통하여 성리학적인 향촌 교화를 이루어 향촌 자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이를 실행하기 위한 기구로 유향소(留鄕所)를 활성화하려고 하였다. 또한 향촌에 향사당(鄕射堂)을 설치하여 향촌 재지사족의 중심 기구로 삼고자 하였다. 그 결과 안동, 영천, 광주 등지에 향사당이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예천의 권오복이 지은 「향사당기(鄕射堂記)」에서, “지금 국가에서 옛 법을 좇아 예교(禮敎)를 숭상하고 향사의 예를 마련하였다. 활쏘기는 한 가지 기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손님의 차례를 정하고 좌주를 드는 예가 이 의식에서 거행된다. 그리하여 한 고을의 선악을 구별할 수 있게 한다. 이는 고을의 부로들이 명칭은 비록 향사당이라고 하지만 권장하고 징계하는 깊은 뜻이 실로 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향사례가 향촌 교화에 일정 부분 기능한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이래로 조선초기까지 지속되어 오던 음사(淫祀)를 배격하고 향촌 사회에 유교적 풍속을 확립하기 위한 향음주례와 함께 향사례의 권장은 계속되었다. 특히 중종대 이후 사림파들은 그 시행을 강력히 건의했으나, 실제로 향사 의식의 형식성 때문에 오히려 백성들에게 웃음거리가 됨으로써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광조(趙光祖)의 등장 이후 천거제가 등장하면서 향사례는 다시 강조되었다. 향사례의 근본 의의가 읍양(揖讓)하는 속에 있는 만큼 학술의 근본이라고 인식함으로써 천거제의 기반이 된 것이다. 더구나 향약보급운동이 일어남에 따라 향약 규정 안에 향음주례와 향사례, 강신례 등이 포함되어 시행되었다. 다만, 향사례는 독자적인 행사로 시행되기보다는 향약의 집회 때에 부속 행사로 행해졌다.

이렇듯 향사례는 크게 활성화되지는 못했으나,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나라의 기반을 회복하는 방안의 하나로 향사례를 시행하여 예와 무비를 동시에 갖추게 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와 함께 17세기 이후 유자(儒者)들에 의한 향촌 교화를 위한 향사례와 향음주례와 관련한 서적의 편찬이 이루어졌다. 정조 때에는 향례(鄕禮)에 근간을 이루는 향음주례와 향사례, 향약을 종합한 『향례합편(鄕禮合編)』을 편찬하여 국가 차원에서 풍속 교화를 강조하였다. 이렇듯 유교적 문치주의를 지향한 조선왕조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적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또한 평상시에는 예의를 함양하는 수단으로 활쏘기를 권장하였다.

절차 및 내용

향사의는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에 개성부(開城府)와 여러 도(道)의 주(州)·부(府)·군(郡)·현(縣)에서 행하였다. 하루 전날 주인(主人)이 소재 관사(官司)의 빈(賓)에게 알리는데, 빈은 효제하고 충신하여 예의를 좋아하고, 행실이 난잡하지 않은 사람을 선택한다. 사단(射壇)은 학당의 근처에 만들며, 90보 거리에 과녁인 후(候)를 설치한다. 후는 청색포(靑色布)로 바탕을 만들고, 높이와 넓이는 1장(丈) 8척(尺)으로 하며, 그 넓이는 세 등분하여 정곡(正鵠)이 그 1등분을 차지하는데, 정곡은 사방을 6척으로 한다. 흰색을 칠한 가죽으로 모지게 이를 만들어 후의 복판에 붙이고, 돼지의 머리를 그린다.

주인의 자리는 사단 동쪽에 서향하여 설치하고 빈 중 2품 이상의 자리는 사단 서쪽에 동향하여 설치하되 북쪽을 상(上)으로 한다. 중빈(衆賓) 3품 이하의 자리를 남쪽 줄에 설치하되 동쪽을 상으로 한다. 서인(庶人)은 사단 아래에 동쪽·서쪽에서 서로 마주 보게 하되, 북쪽을 상으로 한다. 주탁은 사단 남쪽에 동쪽 가까이 설치하고, 오르지 못한 사람의 주탁은 그 앞에 설치한다.

빈 이하가 그 시각에 집합하여 이르면, 주인이 문밖에 나가서 맞이하여 읍양(揖讓)을 하면서 먼저 들어오고, 빈이 이어 들어오며, 중빈이 이를 따라 사단에 이른다. 주인은 동쪽에 있고 빈은 서쪽에 있어, 빈이 두 번 절하면 주인이 답하여 두 번 절한다. 다음에 중빈이 행례하기를 위의 의식과 같이 한다. 주인이 일어나면 빈 이하의 관원이 모두 자리에 나아간다.

공인(工人)이 금슬(琴瑟)을 잡고 주탁의 남쪽에 올라와 앉되, 동쪽을 상으로 하고 음악을 연주하기를 평상시와 같이 한다. 집사자(執事者)가 탁자를 설치하고 술을 따르면, 주인이 빈에게 술잔을 드리고, 빈이 주인에게 술잔을 돌리기를 평상시의 예절과 같이 한다. 술이 세 순배 돌면, 이내 주탁을 치운다.

사사(司射)가 빈에게 활쏘기를 청하면, 빈이 쏘기를 허락한다. 사사가 마침내 주인에게 알리고, 이를 마치면 서계(西階)에게 내려와 제자에게 명하여 사기(射器)를 바치게 한다. 사사가 활을 쥐고, 네 개가 한 묶음으로 된 화살[乘矢]을 등에 꽂고 사단에 도로 올라와서 활을 쏜다. 이를 마치면 빈과 주인이 화살 3개를 등에 꽂고 1개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서 차례대로 활을 쏜다. 매 화살을 쏠 적마다 음악이 시작되고, 화살을 쏘면 반드시 절차에 맞게 한다.

활쏘기를 마치면, 사사가 제자에게 명하여 술잔을 주탁에 설치한다. 화살을 맞히지 못한 사람은 술잔에 술을 채우고 조금 뒤로 물러가 서서 마신다. 중빈 중에서 맞히지 못한 사람은 차례대로 잇달아 술을 마신다. 마시기를 다하면 이내 술잔을 치우고, 빈과 주인이 모두 일어나서 두 번 절하는 예를 행하기를 처음과 같이 한다. 빈이 내려와서 나가면 중빈이 따라 나가는데, 주인이 문밖에서 보내기를 평상시의 예절과 같이 한다. 사사는 여러 사람이 추앙하고 복종하는 사람으로 이를 삼고, 치적(置籍)·예청(禮請)·구장(具狀)·예책(禮責)·제적(除籍)·상자(相者)·지판(支辦) 등의 일은 모두 향음주(鄕飮酒)의 의식과 같게 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고대부터 활쏘기는 남자들만의 일로 인식되었다. 남자가 처음 태어나면 뽕나무로 만든 활에 쑥대 화살을 메워서 천지와 사방을 향하여 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리하여 나라에 일이 없을 때에는 사례(射禮)를 익히되 크게는 대사례를 행하고 작게는 향사례를 행하여 사람의 덕을 살피는 수단으로 삼았다. 반면 나라에 일이 일어나면 변방을 방어하는 데 쓰는데, 작게는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고 크게는 장군의 지위에 오르는 데 기능하였다.

『예기』「사의(射義)」에 따르면, “쏘아서 정곡(正鵠)을 맞히는 자는 현자(賢者)이다.” 하고, “불초한 자가 어떻게 맞힐 수 있겠는가?” 하였다. 또한 “쏘는 자는 자기 몸을 바르게 한 뒤에 쏘는 것이니 쏘아서 맞히지 못해도 이긴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그 까닭을 자신에게 반성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 양반 사족들은 누구나 활쏘기를 아랫사람을 다루고 자신을 바르게 하는 중요한 수양 방법으로 인식하였다.

향사례의 관행은 조선후기로 들어서며 세시풍속으로 발전되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매년 3월과 9월에 서울과 지방의 무사와 동리 사람들이 모여 과녁을 펼쳐 걸고 편을 나누어 활쏘기 대회를 하여 겨루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듯 활쏘기는 원래 남성 중심의 무예이자 관덕(觀德)의 수단으로 인식되었으나 근대에 들어와 여성들도 참여하는 기예로 변화되었다.

참고문헌

  • 『의례(儀禮)』
  • 『주례(周禮)』
  • 『예기(禮記)』 「사의(射義)」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지봉유설(芝峰類說)』
  • 『향례합편(鄕禮合編)』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 『한국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박물관, 2005.
  • 이중화, 『조선의 궁술』, 조선궁술연구회, 1929.
  • 이태진, 『한국사회사연구』, 지식산업사, 1986.
  • 고영진, 「조선 중기 향례에 대한 인식의 변화」, 『국사관논총』 81, 1998.
  • 박경하, 「정조조 향례합편(鄕禮合編)의 간행과 향약의 성격」, 『김용덕박사정년기념사학논총』, 1988.
  • 심승구, 「한국의 궁술과 그 특성」, 『제4회 동북아세아스포츠체육사학회 발표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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