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朴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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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4년(명종 19)~1622년(광해군 14) = 59]. 조선 중기 선조 ~ 광해군 때 활동한 문신. 홍문관(弘文館)전한(典翰)을 지냈다. 자는 자정(子貞)이고,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박대용(朴大容)이며, 어머니 평양 조씨(平壤趙氏)는 조경운(趙慶雲)의 딸이다. 부인 반남 박씨(潘南朴氏)는 박려(朴瓈)의 딸이다. 형은 판서(判書)박건(朴楗)이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602년(선조 35) 별시(別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606년(선조 39) 12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이 되고, 1607년(선조 40) 1월 공조 좌랑(佐郞)이 되었다.

1609년(광해군 1) 5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고, 그 해 8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가 되었으며, 8월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이 되었다. 1612년(광해군 4) 4월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고, 그 뒤 그 해 이조 좌랑(佐郞)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10월 다시 세자시강원 사서가 되었다가 11월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그 해 12월 초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가 12월 중순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1614년(광해군 6) 8월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고, 9월 집의로서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하였다가 9월 중순에 세자시강원 필선이 되고, 그 달 하순에 다시 집의가 되었다. 그 해 10월 교리(校理)가 되었으며, 12월 집의가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5월 다시 집의가 되고, 그 해 6월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고, 7월 집의가 되었으며, 11월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 이때 <김제남(金悌男)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궁자(弓子) 1정(丁)을 하사받았다. 1616년(광해군 8) 1월 홍문관 전한(典翰)이 되었다. 1617년(광해군 9) 1월 정사(正使)오윤겸(吳允謙)과 함께 회답부사(回答副使)로 일본에 가서 그 해 11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잡혀갔던 피로인(被虜人) 50명을 인솔해 데리고 왔으며, 이때부터 일본과의 수교가 정상화되었다. 1618년(광해군 10) 4월 강릉부사(江陵府使)가 되었다.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성품과 일화

박재의 성품에 대하여는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에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알 수 있다. 그가 부응교로 있을 때 상소한 글의 첫머리에서 자신을 가르켜 말하기를 “성품이 본디 어리석어 시속과 잘 화합하지 못한다.”고 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핸군 7년 6월 18일] 한편 그가 이조 좌랑(佐郞)이 되었을 때 사간원에서 임금께 아뢰기를, “박재는 사람됨이 어리석고 용렬하다.”라고 하고 하였는데, 실록의 사관은 여기에 주를 달아 “박재가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 망령스럽기 짝이 없다.”고 논평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4년 11월 16일] 그러나 좌의정정인홍(鄭仁弘)은 “박재는 충직한 사람이라” 임금에게 아뢰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7년 11월 12일]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