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종해(黃宗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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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9년(선조12)∼1642년(인조20) = 64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의 유일(遺逸). 자는 대진(大進)이고, 호는 후천(朽淺)이다. 본관은 회덕(懷德)이고, 주거지는 충청도 목천(木川)이다. 아버지는 황덕휴(黃德休)이고, 어머니 창녕성씨(昌寧成氏)는 참봉성우(成羽)의 딸이다. 도사(都事)황윤림(黃潤琳)의 손자이고, 한강(寒岡)정구(鄭逑)와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광해군 시대 활동

10세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공부하여 14~15세에 글을 잘 한다고 이미 소문이 났고, 24세에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비로소 학문의 종지(宗旨)를 깨닫게 되었다. 32세 때 문장으로 이름이 나서, 탁영(濯纓)김일손(金馹孫)행장(行狀)을 지었다. 1611년(광해군3) 호남 · 호서 지방의 유생 1천여 명과 함께 퇴계(退溪)이황(李滉)을 헐뜯는 영의정정인홍(鄭仁弘)의 죄를 상소하여 논박하였다. 1613년(광해군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幽閉)한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인도(人道)가 없어지는구나.”라고 한탄하며 과거를 보지 않고, 고향 목천에 은거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 나라에서 구현(求賢)할 때, 고을 현감이 황종해의 행적을 조정에 보고했는데, 그 보고가 미처 인조에게 올라가기도 전에 장유(張維)가 그를 임금에게 추천하여 후릉(厚陵)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부임하지 않았다. 1624년(인조1)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당시 그의 나이가 50여 세 가까이 되었으나, 곡읍(哭泣)과 거상(居喪)의 예절에 조금도 소홀하지 않았다. 1632년(인조10) 이조 판서장유가 또 추천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고, 1634년(인조12) 최명길(崔鳴吉)목서흠(睦叙欽)의 추천으로 영릉(英陵) 참봉에 임명되었으며 1636년(인조14) 제릉(齊陵)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인조실록(仁祖實錄)』에서는 “전 교관황종해는 전야(田野)에서 조용히 자신을 지키면서 늙도록 글을 읽는 사람이다.”라고 기록하였다. 1640년(인조18) 장원서 별제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한 번도 부임하지 않고 산림에 묻혀 살면서, 세상의 명예와 물욕(物慾)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1642년(인조20) 12월 24일 목천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64세였다. 집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를 여력이 없었는데, 원근에 있는 사림(士林)들이 서로 물력(物力)을 출연하여 함께 장례를 치렀다.

학문 활동

황종해는 정구를 통하여 이황의 이기(理氣)에 대한 이원론(二元論)을 공부하였다. 또 도학(道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김장생을 만나 예(禮)를 논하고, 율곡(栗谷)이이(李珥)의 ‘기일원론(氣一元論)’을 묻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퇴도선생산거시(退陶先生山居詩)』의 「발문(跋文)」을 쓰고, 이황과 이이의 이기에 대한 이론을 정리하여 『심성정리기설(心性情理氣說)』을 저술하였다. 당시 이황의 제자들은 영남학파를 이루고 이이와 성혼(成渾)의 제자들은 기호학파를 이루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는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갈려 당파 싸움을 하였는데, 황종해는 중립을 지켰다. 또 황종해는 이황의 향약(鄕約)을 본받아 남전향약(藍田鄕約)의 장단점을 보완한 ‘촌규범례(村規凡例)’ 46조(條)를 만들었다. 이를 충청도 목천을 중심으로 기호 일대에 널리 보급하여, 농촌 사회의 개혁을 도모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안여룡(安汝龍) · 김광훈(金光勳) 등 많은 충청도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제자들은 그의 글을 모아서 문집 『후천집(朽淺集)』을 편찬하였는데, 편찬을 마치고도 경비가 없어서 간행하지 못하다가, 그가 죽은 지 71년 만에 그의 증손자 황응하(黃應河)와 종증손(從曾孫) 고성현감황찬(黃燦)이 1713년(숙종39)에 경상도 고성현(固城縣)에서 간행하였다. 황찬은 황종해의 동생 황종량(黃宗諒)의 손자이다.

성품과 일화

황종해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글을 배우기도 전에 벌써 부모를 섬기는 절도(節度)를 알았으므로, 그를 보는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면서, ‘효성스러운 아이’라고 칭찬하였다. 젊었을 때에 술에 취하여 말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로부터 크게 꾸중을 들은 뒤로는 평생 취하도록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 황종해는 정구와 김장생 문하에서 수학하였기 때문에, 그 신념이 독실하였고옛날 예법을 좋아하였으며, 학문과 행실 닦기에 부지런하였고 효도와 공경을 그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의 충실한 가정 생활을 본 고을 사람들은 그를 신뢰하여, 그의 향약을 지키고 그대로 따랐다. 제사의 절차에도 지극히 엄격하여, 선비(先妣)의 제사에 선고(先考)를 합사(合祀)하지 않았으며, 제사를 받드는 종손(宗孫)은 항렬이 낮더라도 예모(禮貌)를 갖추어 대하였다. 형제 간에 우애하였으며, 가정에서는 서로가 원한과 노여움을 품지 말라고 항상 경계하였다. 자제(子弟)들이 간혹 잘못을 해도, 심하게 꾸짖지 않고 정성스레 타일러서 스스로 깨닫게 하였다. 남들과 교제하는 데는 반드시 마음과 힘을 다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였으며, 잘못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타일러 주었는데, 만일 그래도 고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스스로 자기를 반성하고, 성의(誠意)를 다하여 다시 대하도록 힘을 썼다.

본래 몸이 약하여 잔병이 많았으나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서 의관을 정돈하고 앉아서 글을 읽었다. 『논어(論語)』의 “있더라도 없는 듯이 하고[有若無], 가득하더라도 빈 듯이 하며[實若虛], 남이 나를 범하더라도 따지지 않는다.[犯而不較]”는 말을 즐겨 인용하고, “한평생 가슴 깊이 새겨 둘 명언이 바로 이것이다.”고 하였다. 평생에 의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몸을 깨끗이 지켰다. 산수가 아름다운 곳을 찾아다니고 한가롭게 시(詩)를 읊으면서 스스로 즐겼다. 과거에는 단 한 번도 응시하지 않았고, 경술(經術)에 널리 정통하였으며 예학(禮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의학 · 약학 · 수학까지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충청도 목천 동쪽 삼생동(三生洞) 덕천(德泉)의 선영에 있고 부인과 합장되었는데, 허목(許穆)이 지은 행장이 남아 있다.(『미수기언(眉叟記言)』) 목천의 도동서원(道洞書院),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이홍벽(李弘璧)의 딸로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다. 두 아들은 황곡립(黃鵠立)과 황학립(黃鶴立)이고, 딸은 이감(李堪)의 처이다. 황곡립은 광흥창 봉사를 지냈는데, 그 손자가 황응하이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후천집(朽淺集)』
  • 『탁영집(濯纓集)』
  • 『한강집(寒岡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순암집(順菴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근재집(近齋集)』
  • 『남계집(南溪集)』
  • 『능허집(凌虛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만전집(晩全集)』
  • 『백곡집(柏谷集)』
  • 『송강집(松江集)』
  • 『송암집(松巖集)』
  • 『시암집(時庵集)』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초려집(草廬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