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계현(朴啓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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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4년(중종19)~1580년(선조13) = 57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군옥(君沃), 호는 관원(灌園)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인데, 이조판서박충원(朴忠元)의 아들이고, 영의정(領議政)박승종(朴承宗)의 조부이다. 조성(趙晟)·조욱(趙昱) 형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명종 시대 활동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태학(太學: 성균관)에서 수학하다가, 1550년(명종5) 명종(明宗)이 근정전(勤政殿)에서 유생(儒生)들에게 제술(製述) 시험을 보일 때 우등을 차지하였다. 이리하여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해서 1552년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문관(藝文館)검열(檢閱)을 거쳐, 1553년 홍문관(弘文館)정자(正字)·박사(博士)가 되었다. 평안도감군(平安道監軍), 경상좌도평사(慶尙左道評事)로 나갔다가, 1555년 홍문관수찬(修撰)이 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병조·이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1556년 동지사(冬至使)심통원(沈通源)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갔는데, 명(明)나라 황제가 내려준 은단(銀緞) 등의 물건을 통사(通事)에게 맡겼다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추고(推考)를 당하였다. 1557년(명종12) 홍문관부수찬(副修撰)·부교리(副敎理)로 승진하였고, 이조정랑이 되었다가, 의정부(議政府)검상(檢詳)·사인(舍人)이 되었으며, 1559년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을 거쳐 장단부사(長湍府使)·만포진 병마첨절제사(滿浦鎭兵馬僉節制使)로 나갔다. 그가 이조정랑으로 있을 때 현사(賢士)만을 골라서 등용하고 척신(戚臣)이 추천하는 사람을 쓰지 않았으며,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은 그를 포섭하려고 그 집안에 청혼까지 했으나, 그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기 때문에, 그 보복으로 만포진병마사로 쫓겨났던 것이다. 그러나 외삼촌의 전횡을 싫어하던 명종이 그를 승정원(承政院)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여, 오위장(五衛將)를 거쳐, 1562년(명종17) 우부승지(右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우승지(右承旨)에 차례로 임명하였다. 1564년 병조참지(參知)·대사간(大司諫)·형조참의·대사성(大司成)을 두루 역임하고, 1565년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곧바로 도승지(都承旨)로 승진하였다. 이때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승하하고 명종이 상중에 병환이 났는데, 그가 도승지로서 산릉도감(山陵都監)과 시약청(侍藥廳)의 제조(提調)를 겸임하며, 산릉의 역사를 감독하는 한편 약제를 제조하여 시탕(侍湯)하였다. 이 공로로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에서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하였다. 그 뒤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사헌부대사헌(大司憲),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다. 1566(명종21) 성절사(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와서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

선조 시대 활동

1569년(선조2) 대사간이 되었다가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다. 1571년(선조4) 호조판서로 승진하여,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갔다가, 1572년(선조5) 이조참판에 임명되어, 경연(經筵)동지사(同知事)· 홍문관 제학(提學)을 겸임하였다. 1576년(선조9)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다시 대사헌·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577년 다시 도승지에 발탁되었다가, 공조판서·형조판서로 옮겼다. 1579년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하여 사직하였으나, 선조(宣祖)가 윤허하지 않고 1580년(선조13) 병조판서로 임명하였다. 그 동안 피로가 쌓여서 몸에 부스럼병을 앓았는데,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한직(閑職)인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에 옮겼다. 1580년 4월 8일에 지병으로 죽으니, 향년 57세였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보다 몇 해를 더 살았는데, 먼저 죽은 아들을 애통해하다가 병이 나서 죽었다. 그는 대간(臺諫)으로 재직할 때 동인(東人)·서인(西人)의 당쟁을 억제하려고 노력하였다.

저서로는 『밀산세고(密山世稿)』가 있다.

성품과 일화

박계현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려서부터 착하고 온순하며 영리하였다. 충신(忠信)을 첫째로 삼고 화평하고 돈후하며, 처세하는 데에는 직분을 다하지 아니한 적이 없었고, 남을 대할 때는 마음을 비우고 경계를 하지 않았다. 일생 동안 권세 있는 집에 드나들지 않았고, 일을 논의할 때 구차스럽게 남에게 영합하지 않았으며, 남의 비난과 칭찬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공무의 여가에는 경서(經書)·사서(史書) 읽기를 즐겼다. 작은 누각을 짓고 그 안에 도서를 쌓아 두고, 그곳에서 날마다 집안의 자제(子弟)들과 강론하였다. 그가 지은 시사(詩詞)는 담백하고 고요하여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하여 그는 “나는 그 근본을 알지 못하고 한갓 말예(末藝)만을 숭상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라고 하였다. 이따금 술로 근심을 풀고 쓸쓸히 속세를 피하는 취미가 있었다.

병이 위독해지자, 아우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어나지 못할 것인데, 부모님을 버려두고 먼저 가니 불효하기 짝이 없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 나의 몸과 넋이 같은 무덤에 따라가서 슬픔을 풀게 되기를 바란다.” 하였다. 그는 내세에 부모를 만나서 같이 살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또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양사모(凉紗帽)’라는 모자가 없었는데, 1566(명종21) 성절사(聖節使)로서 명나라에 갔던 박계현(朴啓賢)이 북경(北京)에서 이것을 사 가지고 와서 쓰고 다니면서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묘소와 비문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두응촌(豆應村)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심희수(沈喜壽)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밀산세고(密山世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석담일기(石潭日記)』
  • 『고봉집(高峯集)』
  • 『기재잡기(寄齋雜記)』
  • 『동각잡기(東閣雜記)』
  • 『기묘록보유(己卯錄輔遺)』
  • 『사계전서(沙溪全書)』
  • 『약천집(藥川集)』
  • 『송계만록(松溪漫錄)』
  • 『죽창한화(竹窓閑話)』
  • 『월정만필(月汀漫筆)』
  • 『해동잡록(海東雜錄)』
  • 『청강소설(淸江小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