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여임(閔汝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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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9년(명종14)∼1627년(인조5) = 69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문신. 자는 성지(聖之), 호는 취옹(醉翁) · 진의(振衣)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군수민사용(閔思容)이고, 어머니 광주김씨(光州金氏)는 직장(直長)김승(金昇)의 딸이다. 찬성(贊成)민제인(閔齊仁)의 손자이고, 부사(府使)민여검(閔汝儉)의 형이다.

선조∼인조 시대 활동

1591년(선조24) 사마시에 진사로 합격하고, 1594년 별시(別試)문과(文科)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6년(선조29) 승문원 권지로 있을 때, 사헌부에서 그가 <임진왜란(壬辰倭亂)> 중 가족 및 재화를 피난시키려 하였다고 파직을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 명(明)나라 장수의 접반관(接伴官)을 지내고, 1599년(선조32) 형조 정랑, 이듬해 예조 정랑, 그 이듬해 사헌부 지평 및 병조 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605년(선조38) 사헌부 장령이 되어 경차관(敬差官)강대호(姜大虎)의 잘못을 지적하고 파면을 건의하였으나 실현하지 못하였다. 1608년(광해군즉위) 사간과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냈고, 1614년(광해군6) 남원부사(南原府使)가 되었다. 그 사이 흥해(興海) · 덕원(德源)의 수령을 지냈다. 1623년(인조1) 우부승지 · 좌부승지, 병조 참의로 활약하였으며, 1626년(인조4) 공조 참판을 지냈다. 1627년(인조5) 9월에 죽으니, 향년 69세였다.

성품과 일화

민여임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몸체가 뛰어나게 컸으며, 눈동자의 광채가 사람을 쏘아 보는 듯하였다. 집안의 법도는 엄격하여 자제들이 옆에서 그를 모실 때 감히 쓸데없는 말을 하거나 희롱하는 기색을 보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청렴하고 엄격하여 벼슬살이를 하다가 돌아올 때에는 번번이 주머니와 상자 속이 텅텅 비어 있었다. 중국 북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적에는 여행 중에 쓰던 주방 기구까지도 모두 의주(義州)에 남겨 두고 왔다. 항상 술을 좋아하여 스스로 호를 취옹(醉翁)이라 하였는데, 다른 사람과 술을 마시다가 불만스러운 마음이 생기자 그 얼굴에다 술을 내뿜은 적도 있었다. 또 별호(別號)를 진의(振衣)라고 할 정도로 항상 옷을 털어서 먼지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정결하였다. 그의 호에서 그 성품이나 정기(正氣)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묘소와 후손문

묘소는 경기도 수원(水原) 광덕리(廣德里)의 선영에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죽은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첫째 부인 해주최씨(海州崔氏)는 선전관(宣傳官)최여개(崔汝漑)의 딸인데,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고, 둘째 부인 경주이씨(慶州李氏)에게는 자식이 없다. 장자 민계(閔枅)는 현감을 지냈고, 민계의 아들 민광혁(閔光爀)도 현감을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동계집(桐溪集)』
  • 『속잡록(續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입암집(立巖集)』
  • 『백곡집(栢谷集)』
  • 『고담일고(孤潭逸稿)』
  • 『하곡집(荷谷集)』
  • 『동계집(桐溪集)』
  • 『경정집(敬亭集)』
  • 『청사집(晴沙集)』
  • 『성담집(性潭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