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승방략(制勝方略)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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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제승방략 |
한글표제 | 제승방략 |
한자표제 | 制勝方略 |
관련어 | 진관체제(鎭管體制), 자전자수(自戰自守), 주진(主鎭), 거진(巨鎭), 제진(諸鎭) |
분야 | 정치/군사·국방/병법·훈련법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박재광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제승방략(制勝方略) |
유사시에 각 읍의 수령들이 소속 군사를 이끌고 본진을 떠나 지정된 방위 지역으로 가서 서울에서 파견된 장수나 그 도의 병·수사를 기다려 지휘를 받는 군사전략.
개설
제승방략(制勝方略)이란 각 진관의 군사 수가 적으니 유사시에는 각 고을의 수령이 그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전투가 벌어지는 거점 지역으로 이동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전문 지휘관의 지휘를 받아 임무를 수행하는 군사전략이다.
내용 및 특징
조선전기 국방체제의 근간은 진관체제(鎭管體制)였다. 1457년(세조 3)에 확정된 진관체제는 행정조직 단위인 읍(邑)을 동시에 군사조직 단위인 진(鎭)으로 편성해 주진(主鎭)·거진(巨鎭)·제진(諸鎭)으로 나누고, 각 읍의 행정관인 수령이 군사지휘관도 겸임하도록 한 제도였다. 한마디로 진관체제는 국방 체제를 전 국토로 확대해 행정조직과 맞물려 일원화한 조치였다. 주진은 최고지휘부이며, 훈련과 방어의 중심은 거진에서 이루어졌다.
진관체제의 방어는 각 진관 단위로 자전자수(自戰自守)를 원칙으로 하여 병력을 다른 진관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적침이 있으면 먼저 제1선 진관이 대적하고 해당 진관이 함락되더라도 다른 진관이 계속해서 적과 대적했다. 그래서 다른 진관으로 적이 침입할 때까지 시간을 확보해 적의 진격을 최대한 저지했다.
그런데 진관체제는 몇 가지 단점이 있었다. 전 국토를 방위 대상에 포함시키다 보니 국가방위에서 전방·후방의 구별이 없었다. 방위체제가 평면적이어서 요충지에 실질적인 방어력을 투입하기 어려웠다. 예컨대, 만약 적이 상습적으로 침입하는 지역이 있다면 군사력을 이 지역에 집중시켜야 한다. 실제로 왜구 침입이 남해 연안에 집중되면서 이 지역의 중점 방어가 불가피해졌다. 하지만 진관체제에서는 군사를 분산 배치하므로 집중적으로 적을 격퇴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진관체제는 전 국토방위이다 보니 많은 군사가 필요했고 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보인(保人)을 확보해야 했다. 하지만 군역 기피로 16세기 이후 대립제(代立制)가 성행하면서 병력 수가 감소했고 군사들의 전투력도 점점 저하되었다. 더구나 문관이 수령으로 임용된 지방에서는 군사 문제를 잘 알지 못한 사람이 군사지휘권을 겸하므로 국방에 무관심한 결과를 초래했다.
한편 한반도 연해지방은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해방정책(海防政策)을 충실히 하면서 왜인들을 회유하는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은 1419년(세종 1) 대마도 정벌이라는 강경책을 쓰는 한편 평화적인 회유책도 마련해 왜구의 요구를 수용했다. 그중 하나가 1426년(세종 8)에 정식으로 세 개 포구를 개항해 왜인들의 교역을 허가한 일이었다. 왜인들의 왕래를 허가한 포구는 동래 부산포, 웅천 내이포 또는 제포, 울산 염포로 흔히 삼포(三浦)라고 한다.
삼포에서 교역을 끝낸 왜인들은 원칙적으로 곧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상주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여러 폐단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조선은 엄격한 교역 통제책을 쓰면서 이들의 귀환을 재촉했다. 그러자 왜인들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마찰도 잦아졌고 마침내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의 발단이 되었다.
삼포왜란을 계기로 일본의 침략 규모가 커지면서 조선은 왜적의 주요 침입로에 병력을 집중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런 배경에서 새롭게 등장한 방위 전략이 제승방략(制勝方略)이었다. ‘제승’이란 적을 제압해 승리를 거둔다는 뜻이다. 제승방략은 전 국토의 평면적인 군사 배치를 지양하고 여러 진관의 군대를 제일선 방어에 집중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남방에 적침이 발생하면 중앙에서 지휘관이 중앙군을 인솔해 내려가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와 나란히 군사를 나누어 갖고 대적했다. 이때 각 도 수령은 소속 군사를 이끌고 본진을 떠나 미리 배정된 방어지역으로 이동해 진관 단위와 상관없이 주장(主將)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이때 한곳에 집결한 군사를 전시 편제로 새로이 편성해 여러 지휘관 휘하에 소속시키므로 분군법(分軍法)이라고도 한다.
요컨대, 제승방략은 각 진관별로 자전자수(自戰自守)하는 진관체제와 달랐다. 유사시에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군사들을 하나의 방어진지에 모아놓고 공동 대처하는 방어 전략이었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때에도 제주목사김수문이 이 전략으로 왜구를 추격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변천
조선에서는 남쪽 지역뿐만 아니라 북쪽 지역에서도 제승방략에 의한 분군법이 행해졌다. 1583년(선조16) 2월에 여진족이 니탕개의 난[尼湯介亂]을 일으켜 대규모로 조선의 북방을 침략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도체찰사(都體察使)와 방어사(防禦使) 등을 파견해 병사와 함께 지방군을 나누어 지휘하도록 했다.
니탕개의 난이 있은 뒤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이일(李鎰)은 1588년 3월에 『제승방략』을 펴냈다. 1670년(현종 11) 『제승방략』을 중간하면서 여기에 발문을 쓴 이선(李選)의 말에 따르면 이미 북방에서는 김종서(金宗瑞)가 시행한 제승방략법이 있었다. 이것을 이일이 증보, 정리해 펴낸 책이 『제승방략』이라 한다. 『연려실기술』에도 “『제승방략』은 육진의 방수(防戍)를 논했으며 김종서가 짓고 이일이 증보했다.”고 되어 있다.
김종서가 시행했다는 제승방략법은 현재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북방의 오랑캐를 막는 ‘방략’으로서 유사시에 여러 도의 군사를 대규모로 동원하던 체제로 짐작된다. 1460년에 오랑캐 낭발아한(浪孛兒罕, [낭볼칸])이 침입했을 때에는 북쪽 지역만 아니라 남쪽 지역과 강원도 군사까지 동원한 사례가 있다. 남방 지역에서는 왜구가 주 위협 대상이었기 때문에 소수의 병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적침이 반복되는 곳에 병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하는 방법을 택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1555년 을묘왜변이었다. 1555년 왜구가 7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전라도의 영암·강진·진도 일대를 습격해오자 제주목사김수문이 전라도에 있으면서 처음 분군법(分軍法)을 이용하여 도내의 여러 고을 병력을 순변사(巡邊使)·방어사(防禦使)·도원수(都元帥) 등의 중앙에서 내려온 장수들과 본도의 병사 및 수사에게 나누어 소속시켜 왜구를 성공적으로 격퇴시킬 수 있었다.
이후 1583년 1월에 니탕개와 율보리(栗甫里)가 조선의 변방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당시 전라도수군절도사로 있던 이일은 그해 4월에 경원부사로 임명되면서 함경도와 인연을 맺었다. 그 후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이일은 “적로의 형세, 부락의 다소, 산천의 험악과 평탄, 도로의 멀고 가까움, 성을 지키는 절차, 적을 추격하고 요격하는 등의 일”을 틈나는 대로 현지 조사하고 여러 조건을 참작해 『제승방략』을 출간했다.
이일이 완성한 『제승방략』은 유사시에 북도의 병마절도사를 중심으로 도내의 전체 병력을 동원하는 체제였다. 남방의 제승방략이 중앙에서 파견한 경장(京將)이 중심이 되었다면, 북방의 제승방략은 현지 병마절도사가 중심이 되어 군사를 통솔했다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양자 모두 군사력의 피폐와 지휘관의 비전문성으로 인해 진관체제가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자, 전문 지휘관을 중심으로 남아 있는 병력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는 공통점을 띤다.
그러나 진관체제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승방략도 임진왜란이라는 전면전이 발생하자 여러 문제점을 드러냈다. 가장 큰 문제는 제승방략법이 변방의 국지전을 대비하는 방어체제의 성격이 강하다 보니 전면전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군사력을 제1 방어선에 집중 투입하다 보니 제일선이 무너지면 후방의 제2, 제3 방어선을 형성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인근 지역이 빠르게 함락되었다.
또 적이 급박하게 진격하는 상황에서 중앙에서 적시에 지휘관을 파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결과 지휘관이 도착하기 전에 적이 침입하면 집결한 군사는 지휘관이 없는 오합지졸이 되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중앙에서 파견한 지휘관과 지방의 지휘관이 뒤엉켜 명령 계통이 통일되지 못하는 혼선을 빚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몇 해 전에 유성룡은 제승방략은 반드시 패배할 방책이라고 하면서 선조에게 진관체제의 복귀를 주장했다.
유성룡이 지적한 제승방략의 폐단은 임진왜란 초기 상주 지역 함락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1592년(선조 25) 4월 17일에 조정에서는 이일에게 중도에서 일본군을 막아내라는 임무를 맡겼다. 명령을 받은 이일은 19일에 도성을 출발했다. 당시 경상감사김수(金晬)는 적침 보고를 받고 즉시 제승방략에 의거해 각 고을 수령에게 통첩을 보내 소속 군사를 이끌고 약속 장소에 집합하도록 했다. 이 지령에 따라 문경 이하의 수령들은 군사를 인솔해 대구로 달려와 냇가에 노숙하면서 순변사(巡邊使)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적의 선봉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많은 군사가 놀라 동요해 흩어졌고 수령들도 도망쳤다.
도성을 출발한 이일이 조령을 넘어 문경에 도착한 날은 23일이었다. 이일이 도착해보니 이미 고을이 텅 빈 상태였다. 이일은 인솔해온 군사를 먹인 후 행군을 계속해 상주에 도착했으나 상주목사김해(金澥)마저 달아난 상태였다. 이일은 24일 하루 동안 부근의 백성 수백여 명을 모아 대오를 편성하고 25일 아침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때 일본군이 훈련 중인 이일의 군대를 급습했다. 이일은 일본군이 선산에 주둔한 상황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급습을 당했다. 대부분 농민들로 구성된 이일의 군대는 대항조차 제대로 못 해본 채 궤멸했다. 이일은 단신으로 겨우 탈출해 문경에서 패전 보고를 올리고 그대로 조령을 넘어 충주에서 신립(申砬) 군대와 합류했다.
18세기 군사전문가 송규빈(宋奎斌)도 왜란 당시 운용된 제승방략의 결함을 신랄하게 지적했는데, 실패한 책임이 ‘제(制)’에 있지 ‘병(兵)’에 있지 않다는 지적은 의미 있다고 하겠다.
의의
조선의 국토방위전략은 진관체제를 근간으로 하여 대내외적 상황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다. 진관체제를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제승방략 역시 비판이 쏟아지면서 이를 대처하는 또 다른 방어체제가 등장했다. 새로운 방위전략이 나오면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에 따라 새로운 병서도 간행했다. 이는 전략·전술의 원칙이나 실제적인 운용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체계화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제승방략은 시대의 흐름을 고려하여 전문 지휘관을 중심으로 병력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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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제승방략(制勝方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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