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하(朴大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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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7년(선조10)~1623년(인조1) = 47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에 활동한 문신. 초명은 박대겸(朴大謙)이며, 자는 무업(茂業)이고 호는 송곡(松谷)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인데, 세거지는 경기도 화성(華城)이다. 아버지는 생원(生員)박여(朴瓈)이고,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직장(直長)성세강(成世康)의 딸이다. 죽창(竹窓)박원도(朴元度)의 조부이다.

선조 시대 활동

1603년(선조36) 정시(庭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뒤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이 되었다. 어렵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조정안에서 그를 보증하여 천거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청요직(淸要職)으로 가지 못하였다. 과거로 인재를 선발하더라도 여전히 문벌 가문이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다. 관례에 따라 예조좌랑·병조좌랑으로 옮기고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다. 그 뒤 차출되어 의주(義州)와 중강(中江)의 시세(市稅)를 감독하는 관리가 되었다. 당시 의주의 강동진(江東鎭)과 만포(滿浦)의 중강진(中江鎭)에서는 조선(朝鮮)과 중국(中國)의 상인들이 모여서 교역을 행하였는데, 조선과 중국에서 관리를 보내어 상세(商稅)를 징수하였다. 관리 중에는 부정을 한다는 오명을 쓴 사람이 많았으나, 그는 청렴하게 봉직(奉職)하였기 때문에 사헌부(司憲府)감찰(監察)로 발탁되었다. 그 뒤에 함경도(咸鏡道)의 막직(幕職)과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로 나가 만주(滿洲)의 누르하치가 부족을 통일하고 조선의 국경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북방의 방어에 힘을 기울였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선조41) 선조(宣祖)가 승하하자,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의 천거로 훈련도감(訓練都監)의 낭청(郎廳)이 되었고, 형조정랑·사복시(司僕寺)첨정(僉正)을 거쳐 선천부사(宣川府使)로 나갔는데, 그때 농지 개간과 군사 훈련에 힘을 기울여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조정에 들어와서 형조정랑· 예조정랑· 공조정랑· 통례원(通禮院)상례(相禮)를 거쳐, 1613년(광해군5) 군자감(軍資監)정(正)에 임명되어 춘추관편수관(編修官)을 겸임하였다. 이때 광해군(光海君)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幽廢)하려고 하자, 정권을 잡은 북인(北人)이이첨(李爾瞻) 등은 백관들을 동원하여 이것을 대궐 뜰에서 청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여 참여하지 않는 서인(西人) 38명에게 역적(逆賊)이라는 죄명을 뒤집어 씌웠다. 그는 이것을 보고 자기 처지를 위태롭게 여겨 외직(外職)으로 나갈 것을 자원하여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 그러나 곧 사직하고 고향 화성(華城)으로 돌아가서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에 서인 정권이 ‘폐모론(廢母論)’에 가담하지 않고 벼슬을 버린 박대하를 다시 등용하려 하였으나, 병이 이미 심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1623년 윤10월 27일에 죽으니, 나이가 47세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송자대전(宋子大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