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정옹주(淑貞翁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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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 ?]. 조선 제3대 임금인 태종(太宗)의 딸로 옹주.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태종의 후궁으로, 영월 신씨(寧越辛氏)검교(檢校)공조 참의(參議)신영귀(辛永貴)의 딸인 신신빈(辛信嬪)이다. 친오라버니는 함녕군(諴寧君)과 온녕군(溫寧君)이며, 친언니는 정신옹주(貞信翁主), 정정옹주(貞靜翁主)이고, 친동생들은 소신옹주(昭信翁主), 숙녕옹주(淑寧翁主), 숙경옹주(淑慶翁主), 숙근옹주(淑謹翁主)이다. 부마는 연일 정씨(延日鄭氏)로 일성군(日城君)정효전(鄭孝全)이다.

출생과 혼인생활

숙정옹주(淑貞翁主)는 태종과 신신빈의 사이에서 태어난 2남 7녀 중 3녀로 태어나서, 1422년(세종 4) 도총제(都摠制)정진(鄭鎭)의 아들인 정효전과 결혼하였다.(『세종실록』 4년 1월 18일) 결혼 후 옹주는 숙진옹주(淑眞翁主)에 봉해졌고, 부마인 정효전은 일성군이 되었다.(『세종실록』 4년 2월 4일)

한편 1422년(세종 4) 대호군(大護軍)유언강(庾彦剛)이 참형을 당하였는데, 이는 숙정옹주와 부마 정효전과 관련이 있었다. 숙정옹주는 어렸을 때 병을 피하기 위하여 유언강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 유언강의 여비(女婢)가 숙정옹주에게 젖을 먹였으므로 유언강과 숙정옹주는 수양(收養) 관계가 되어 유언강은 대호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숙정옹주는 유언강의 집에서 정효전에게 시집을 갔었다. 그러나 태종이 세상을 떠난 후 유언강은 다시는 의탁할 데가 없다고 생각하여, 정효전을 구박하며 접대하는 언사도 또한 공손하지 않았다. 이를 들은 세종이 의금부(義禁府)에서 유언강을 국문하게 하였고, 결국 그는 죽음을 당하였던 것이다.(『세종실록』 4년 9월 19일)

1453(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안평대군(安平大君)과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는데, 정효전은 안평대군과 가까웠으므로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가 파직되었다.(『단종실록』 1년 10월 10일),(『단종실록』 1년 10월 12일)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수양대군을 모해하려 했다는 이유로 국문을 당하였으나, 병으로 인해 외방으로 보석되었다가 1454년(단종 2)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단종실록』 1년 12월 15일),(『단종실록』 2년 2월 20일),(『단종실록』 2년 3월 4일)

그로부터 얼마 후 정효전은 도진무(都鎭撫)로서 집이 시좌소(時座所)의 위내(圍內)에 있었음에도 계유정난이 발생하던 날 대궐에 나와 시위(侍衛)하지 않고, 또 다음 날에도 병을 핑계로 집에 있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단종실록』 2년 4월 23일) 그리고 서울에 있는 집과 숙정옹주의 전민(田民)을 제외한 그의 재산이 모두 적몰되었다.(『단종실록』 2년 4월 26일) 그러다가 1488년(성종 19) 숙정옹주는 전민을 돌려줄 것을 성종(成宗)에게 호소하였고, 이에 성종은 태종의 친딸인 옹주가 전민도 없이 살아가서는 안 된다며 숙정옹주에게 전민을 돌려주었다.(『성종실록』 19년 8월 19일)

묘소 및 후손

숙정옹주의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 통진면 위곡에 있다.

숙정옹주는 정효전과의 사이에서 2남 4녀를 두었다. 1남은 정원창(鄭元昌)이고, 2남은 정극창(鄭克昌)이다. 1녀는 이승존(李承尊)에게 시집갔고, 2녀는 이의석(李義碩)에게, 3녀는 노맹곤(盧孟昆)과 혼인하였으며, 4녀는 문희공(文僖公)신석조(辛碩祖)의 아들 신순담(辛舜聃)과 결혼하였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만가보(萬家譜)』
  • 지두환, 『태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