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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기구|대표표제=일기청|한글표제=일기청|한자표제=日記廳|대역어=|상위어=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정치/행정/관청|유형=집단·기구|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조선|집필자=이근호|설치시기=|폐지시기=|소속관서=|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8303|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ua_12205016_001 『영조실록』 22년 5월 16일], [http://sillok.history.go.kr/id/kza_12608009_001 『고종실록』 26년 8월 9일], [http://sillok.history.go.kr/id/kua_12205020_001 『영조실록』 22년 5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za_12712018_004 『고종실록』 27년 1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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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승정원일기』의 개수를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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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년(중종 1) 폐위된 연산군 당대의 사록인 『연산군일기』 편찬을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
  
 
=='''개설'''==
 
=='''개설'''==
  
전란이나 화재 등으로 소실된 『승정원일기』의 개수(改修)를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도 일기청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네 차례 정도 『승정원일기』 개수를 위해 일기청이 설치되었으며, 주로 대신이 주관하고 실무는 당상과 낭청이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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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청은 연산군이 폐위된 후 『연산군일기』 편찬을 위해 설치한 임시 관청이다. 1506년에 설치된 후 일기 편찬을 마무리 짓고 1509년에 혁파되었다. 일기청의 구성은 다른 왕들의 실록 편찬을 위한 [[실록청(實錄廳)]]과 동일하였으나 책임자인 총재관은 실록청보다 등급이 낮은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임명된 것이 다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설립 경위 및 목적'''==
  
『승정원일기』는 작성 이후 몇 차례 소실된 바 있으며, 이의 복구를 위해 몇 시기에 일기청이 설치되었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전소(全燒)되면서 『승정원일기』 전부가 소실되었는데, 임진왜란 후에 이를 복구하기 위한 일기청이 설치되었다. 이후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임진왜란 이후부터 1623년까지의 일기가 유실되어 복구되었다. 이때도 일기청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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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적으로 왕의 승하 뒤에는 실록의 찬수를 위해 실록청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경우 폐위된 왕이기에 그 명칭을 실록이라고 하지 않고 일기라 불렀다. 『연산군일기』 편찬을 위한 일기청은 정승들의 건의에 따라 1506년 11월 설치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0111016_005 『중종실록』 1년 11월 16일]).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던지 다음 해인 1507년 6월에 일기청을 다시 설치한 사실이 확인된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0206002_006 『중종실록』 2년 6월 2일]).
 
 
1744년(영조 20) 10월에 창덕궁 인정문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이로 인해 인근에 있던 승정원에 보관된 『승정원일기』의 상당 분량이 소실되었다. 이후 복구를 위한 자료 수집이 진행되다가 1746년 5월 수정을 위해 일기청이 설치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2205016_001 『영조실록』 22년 5월 16일]). 일기청은 이후 고종 연간인 1888년(고종 25) 3월의 화재로 『승정원일기』 약 300여 권이 불에 타자 이를 복구하기 위해 1889년 8월에도 설치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2608009_001 『고종실록』 26년 8월 9일]).
 
  
 
=='''조직 및 역할'''==
 
=='''조직 및 역할'''==
  
본을 검토한 뒤에 문장과 체제를 통일해서 정초본(正草本)을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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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편찬을 위해 설치된 일기청에는 총재관 이하 [[기사관(記事官)]]까지 모두 67명이 임명되었다. 이들을 직급별로 보면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1명,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6명,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8명, [[수찬관(修撰官)]] 5명, [[편수관(編修官)]] 24명, [[기주관(記注官)]] 7명, 기사관 16명 등이다.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에 실무를 총괄하는 총재관은 대신급인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가 담당하였으나, 일기를 편찬할 때에는 정2품직이 감춘추관사로 임명되어 업무를 총괄한 사실이 주목된다.
  
② 『승정원일기』의 복구를 위해 설치한 일기청의 구성에 대해서는 현재 영조대와 고종대 『승정원일기』 개수 관련 기록인 『일기청등록(日記廳謄錄)』이 남아 있어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다. 일기청은 대신이 주관하는 가운데 당상과 낭청이 임명되었다. 영조대에 선임된 당상은 병조참의임정(任珽), 행부사과(行副司果)이철보(李喆輔)·홍계희(洪啓禧) 등이었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ua_12205020_001 『영조실록』 22년 5월 20일]), 낭청은 홍문관응교송창명(宋昌明), 수찬윤득재(尹得載)·조운규(趙雲逵), 전 정언이게(李垍), 겸문학이형만(李衡萬) 등이었다. 낭청은 주로 자료를 베껴 쓰는 역할을, 당상은 이를 관리·감독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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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편찬을 위해 1506년 일기청이 설치되면서 대제학[[김감(金勘)]]이 감춘추관사에 임명되었고, 1507년 2월에는 대제학[[신용개(申用漑)]]가 임명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0202017_001 『중종실록』 2년 2월 17일]). 1507년 4월에는 일기청 관원을 정비하여 총재관에 [[성희안(成希顔)]]을, 도청당상(都廳堂上)에 신용개와 김전(金詮)을, 4개로 이루어지는 각 방의 당상으로는 김봉(金崶)·[[성세순(成世純)]]·[[성세명(成世明)]]·조계상(曺繼商)을 임명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0204011_005 『중종실록』 2년 4월 11일]).
  
고종대 『승정원일기』 개수 시의 일기청 역시 당상과 낭청으로 구성되었는데, 당상에는 박용대(朴容大)를 비롯한 5명이 임명되었고, 낭청에는 김필수(金弼洙)·정인승(鄭寅昇)을 비롯해 김병연(金炳秊)·신병휴(申炳休) 등이 임명되어 활동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2712018_004 『고종실록』 27년 1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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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청 소속 관원의 역할은 실록청의 경우와 동일하다. 일기의 편찬을 위한 최초 작업은 각 방의 낭청이 주로 하고, 각 방의 당상이 이들 낭청을 지휘·감독하였다. 각 방에서 작성하는 것이 초초본(初草本)이다. 초초본은 도청으로 보내져 검토되며, 도청의 낭청은 이를 바탕으로 중초본(中草本)을 작성한다. 도청의 당상과 총재관은 중초본을 검토한 뒤에 문장과 체제를 통일해서 정초본(正草本)을 작성하였다.
  
 
=='''변천'''==
 
=='''변천'''==
  
『승정원일기』의 개수를 위한 일기청은 설치 이후 일기의 개수 작업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여 새로운 절목이 반포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영조대의 경우 업무 추진 과정에서 낭청의 업무 태만과 서역(書役)이 문제가 되었다. 이에 1746년 7월에는 「일기청추절목(日記廳追節目)」이 제정되어 낭청의 업무량을 매일 5장씩, 20일 동안 100장을 기록하여 1권으로 하며 책임량을 다하지 못하면 체차(遞差)하지 않는다고 규정하였다. 이 밖에도 인원이 추가되기도 하였으며, 문자의 누락 방지를 위해서 별도의 인원이 차출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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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편찬은 일기청 주도하에 1509년 9월에 마무리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0409012_002 『중종실록』 4년 9월 12일]). 이어 며칠 뒤에 총재관성희안이 전문(箋文)을 올렸고([http://sillok.history.go.kr/id/kka_10409014_003 『중종실록』 4년 9월 14일]), 『연산군일기』 편찬이 마무리된 뒤에 일기청은 해체되었다.
 
 
1747년 6월에는 「일기청교정절목(日記廳校正節目)」이 반포되어 교정 업무와 관련된 규정이 마련되었다. 이 절목에서 주목되는 것은 일기 마지막 부분에 교정한 사람을 기록한다는 것으로, 이는 책임자의 이름을 기록함으로써 정확성을 기하고자 한 조치였다. 영조대의 일기청은 1747년 11월에 사업이 완료되면서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고종대의 일기청은 1890년(고종 27) 12월, 361권의 『승정원일기』 개수가 마무리된 뒤에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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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 「『일기청등록』해제」, 『일기청등록』, 한국고전번역원, 2005.       
 
*오항녕, 「『일기청등록』해제」, 『일기청등록』, 한국고전번역원, 2005.       
 
*이근호, 「영조대 『승정원일기』 개수 과정의 검토」, 『조선시대사학보』31, 2004.       
 
*이근호, 「영조대 『승정원일기』 개수 과정의 검토」, 『조선시대사학보』3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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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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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2:05 판



1506년(중종 1) 폐위된 연산군 당대의 사록인 『연산군일기』 편찬을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

개설

일기청은 연산군이 폐위된 후 『연산군일기』 편찬을 위해 설치한 임시 관청이다. 1506년에 설치된 후 일기 편찬을 마무리 짓고 1509년에 혁파되었다. 일기청의 구성은 다른 왕들의 실록 편찬을 위한 실록청(實錄廳)과 동일하였으나 책임자인 총재관은 실록청보다 등급이 낮은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임명된 것이 다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통상적으로 왕의 승하 뒤에는 실록의 찬수를 위해 실록청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경우 폐위된 왕이기에 그 명칭을 실록이라고 하지 않고 일기라 불렀다. 『연산군일기』 편찬을 위한 일기청은 정승들의 건의에 따라 1506년 11월 설치되었다(『중종실록』 1년 11월 16일).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던지 다음 해인 1507년 6월에 일기청을 다시 설치한 사실이 확인된다(『중종실록』 2년 6월 2일).

조직 및 역할

『연산군일기』 편찬을 위해 설치된 일기청에는 총재관 이하 기사관(記事官)까지 모두 67명이 임명되었다. 이들을 직급별로 보면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1명,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6명,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8명, 수찬관(修撰官) 5명, 편수관(編修官) 24명, 기주관(記注官) 7명, 기사관 16명 등이다.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에 실무를 총괄하는 총재관은 대신급인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가 담당하였으나, 일기를 편찬할 때에는 정2품직이 감춘추관사로 임명되어 업무를 총괄한 사실이 주목된다.

『연산군일기』 편찬을 위해 1506년 일기청이 설치되면서 대제학김감(金勘)이 감춘추관사에 임명되었고, 1507년 2월에는 대제학신용개(申用漑)가 임명되었다(『중종실록』 2년 2월 17일). 1507년 4월에는 일기청 관원을 정비하여 총재관에 성희안(成希顔)을, 도청당상(都廳堂上)에 신용개와 김전(金詮)을, 4개로 이루어지는 각 방의 당상으로는 김봉(金崶)·성세순(成世純)·성세명(成世明)·조계상(曺繼商)을 임명하였다(『중종실록』 2년 4월 11일).

일기청 소속 관원의 역할은 실록청의 경우와 동일하다. 일기의 편찬을 위한 최초 작업은 각 방의 낭청이 주로 하고, 각 방의 당상이 이들 낭청을 지휘·감독하였다. 각 방에서 작성하는 것이 초초본(初草本)이다. 초초본은 도청으로 보내져 검토되며, 도청의 낭청은 이를 바탕으로 중초본(中草本)을 작성한다. 도청의 당상과 총재관은 중초본을 검토한 뒤에 문장과 체제를 통일해서 정초본(正草本)을 작성하였다.

변천

『연산군일기』 편찬은 일기청 주도하에 1509년 9월에 마무리되었다(『중종실록』 4년 9월 12일). 이어 며칠 뒤에 총재관성희안이 전문(箋文)을 올렸고(『중종실록』 4년 9월 14일), 『연산군일기』 편찬이 마무리된 뒤에 일기청은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김경수, 『조선시대의 사관(史官) 연구』, 국학자료원, 1998.
  • 오항녕, 「『일기청등록』해제」, 『일기청등록』, 한국고전번역원, 2005.
  • 이근호, 「영조대 『승정원일기』 개수 과정의 검토」, 『조선시대사학보』31, 200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