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세명(成世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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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47년(세종29)∼1510년(중종5) = 64세]. 조선 전기 성종~중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여회(如晦), 호는 일로당(佚老堂)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인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좌참찬성임(成任)이고, 어머니 양천허씨(陽川許氏)는 군자감(軍資監)주부(主簿)허말석(許末石)의 딸이다.

세조~성종 시대의 활동

1468년(세조14) 사마시를 거쳐 1475년(성종6) 알성(謁聖)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9세였다. 사헌부 감찰(監察)에 임명되고, 1476년(성종7)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1477년(성종8) 아버지의 병환을 간호하기 위하여 자청하여 한가한 돈녕부(敦寧府)주부(主簿)로 자리를 옮겼다. 1479년(성종10) 홍문관 수찬(修撰)에 발탁되어 사간원 정언(正言)과 공조 좌랑을 거쳐, 1483년(성종14) 다시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 1484년(성종15)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상례를 끝마치고, 예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1487년(성종18)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고, 사재감 첨정(僉正), 시강원 필선(弼善)을 거쳐, 군기시(軍器寺) · 예빈시(禮賓寺) · 봉상시(奉常寺)부정(副正)을 역임하고, 성균관 사성(司成), 홍문관 전한(典翰)으로 옮겼다. 1490년(성종21)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고, 사섬시(司贍寺)정(正)으로 승진하였다. 1494년(성종25) 홍문관에 들어가서 직제학(直提學) ·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되었는데, 시무책으로 토지제도와 공법제도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연산군~중종 시대의 활동

1495년(연산군1)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어 외척(外戚)들이 관직을 함부로 차지하는 것을 논하다가, 호군(護軍)으로 좌천되었으나, 곧바로 병조 참지에 임명되어 돈녕부 도정(都正)과 공조 참의로 옮겼다. 1497년(연산군3)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좌부승지(左副承旨), 우승지, 좌승지를 거쳐, 1498년(연산군4)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다. 그 뒤에 돈녕부 동지사(同知事)로 옮겼다가, 한성부 우윤(右尹)에 임명되었다. 1499년(연산군5) 부친상을 당하였고 3년 상례를 끝마치자 중추부 동지사에 임명되었다. 1502년(연산군8)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로 나갔다가, 1504년(연산군10)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고 형조 참판으로 전임되었다. 같은 해 폐비윤씨(廢妃尹氏: 제헌왕후)의 시호를 의논할 때 시호와 휘호를 함께 의논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연산군은 시호만 정하는 것이 근본을 보답하는 의미에 합당하다고 하였다. 얼마 뒤에 연산군이 경연(經筵)을 폐지하고 임사홍(任士洪)을 병조 판서로 삼자, 성세명은 “경연은 제왕(帝王)이 정치를 하는 근본이니 오래 폐지해서는 안 되며, 병조는 치란(治亂)이 연관된 일이므로 그 사람을 쓰는 일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연산군이 노하여 그를 의금부로 넘기려 하다가 중추부 동지사로 좌천시켰다.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겨우 화를 면하여, 한성부 좌윤(左尹)으로 옮겼다. 1505년(연산군11) 명나라 효종(孝宗)홍치제(弘治帝)가 승하하자, 진향사(進香使)로 가게 되어 중추부 지사로 승진하였다. 그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연산군에게 명나라 황제는 경연에 부지런히 나간다는 말을 하였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1507년(중종2) 겸 춘추관 지사에 임명되어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를 편수하였다. 1509년(중종4) 돈녕부 지사에 임명되었으나, 1510년(중종5) 4월 병으로 죽으니, 향년이 64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세명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이 순후(淳厚)하여 부귀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는데도 어려서부터 교만하거나 방자하지 않고, 화기가 넘쳤다. 비록 집안 사람이나 노비를 대하여도 기뻐하거나 노여운 빛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사람을 대할 적에도 한결같이 성실하게 대하였으며, 한 번도 꾸밈새를 보인 일이 없었다. 친척 간에는 우애가 독실하였고, 빈곤한 사람은 두루 도와주었으며, 소원한 사람도 친형제처럼 가까이 지냈다. 관직에서 일할 때에도 근신하기를 위주로 하여 교만하거나 세력을 부리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집안에 작은 정자를 짓고 편액(扁額)을 ‘춘휘정(春輝亭)’이라 붙이고, 책을 읽고 꽃을 가꾸며 이를 즐겼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평안(平安)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坡州) 모산(某山)의 언덕에 있는데, 신용개(申用漑)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이요정집(二樂亭集)』 권12 「지돈녕부사 성공 신도비명(知敦寧府事成公神道碑銘)」) 부인 진주강씨(晋州姜氏)는 좌찬성강희맹(姜希孟)의 딸인데, 자녀가 없었다. 양자 성근(成謹)은 아우 성세균(成世鈞)의 아들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이요정집(二樂亭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음애일기(陰崖日記)』
  • 『점필재집(佔畢齋集)』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잡록(海東雜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