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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9일 (토) 22:35 기준 최신판



국왕의 어진(御眞)을 봉안한 진전(眞殿)에서 거행하는 다례.

개설

진전은 선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하고 제향을 거행하는 전각을 가리킨다. 조선시대 주요 진전으로 경기전(慶基殿), 준원전(濬源殿), 목청전(穆淸殿), 영숭전(永崇殿), 봉선전(奉先殿), 영희전(永禧殿), 선원전(璿源殿) 등 여러 곳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진전에서 다례를 거행한 것이 아니라 조선전기에는 봉선전과 조선후기에는 선원전에서 다례를 거행하였다. 전자는 사찰에 건립된 진전이었기 때문에 술 대신 차를 사용함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반면 선원전에서 거행된 다례는 차를 올리는 의식이라기보다 명절 차례와 같이 간소화된 제사였다. 선원전에서는 삭망다례(朔望茶禮), 명절다례(名節茶禮), 탄신다례(誕辰茶禮) 등 다양한 다례가 있었지만 국가의 공식적인 전례(典禮)라기보다 궁궐 내 왕실에서 자체적으로 거행하는 의례였다. 다만 탄신다례 때에는 봉상시(奉常寺)에서 술을 준비하였다. 숙종 때 건립된 선원전은 후대로 갈수록 왕실의 주요한 진전으로 되었기 때문에 다례의 비중도 높아졌다.

연원 및 변천

진전은 국왕의 초상화를 봉안하고 제향을 거행하는 사당이다. 이러한 진전 의례는 종묘와 달리 속제(俗際)로 간주되어 유밀과(油蜜菓) 중심의 제물을 준비하는 등 당시 시속의 방식을 많이 따랐다. 그 중에서도 세조의 어진을 모신 봉선전은 광릉(光陵)의 원찰인 봉선사(奉先寺)에 건립되었기 때문에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747년(성종 5)에 봉선전의 대소 제사에 술을 사용하지 않고 차로 대신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다례는 왕실의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주관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봉선전에 봉안된 세조 어진은 남별전(南別殿)에 옮겨져 봉안되면서 이러한 다례 의식은 사라졌다. 한편, 1695년(숙종 21)에 창덕궁 춘휘전(春輝殿) 내에 숙종 어진을 봉안하고 선원전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는 영조대 후반부터 선원전에 다례를 올린 기록이 등장한다. 영조는 1761년(영조 37) 정월에 왕세손을 데리고 선원전에 전배(展拜)하였으며 그 후에도 선원전에 여러 차례 들러 전배례를 행하였다(『영조실록』 37년 1월 1일). 이와 같이 선원전 다례는 영조대에부터 시작하여 영조의 어진을 봉안한 정조대부터 본격화되었다. 선왕의 탄신일에 거행하는 탄신다례가 가장 많이 보이지만 동지다례, 삭망다례, 그 외 별다례 등도 있었다. 이러한 선원전 다례들은 국가 전례의 범주에 포함되기보다 왕실 내부의 행사로 거행되었다. 영조대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나 정조대 『춘관통고(春官通考)』에서 선원전 의식에 대한 규정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1873년(고종 10)에 편찬된 『태상지(太常志)』에 선원전의 의례로 ‘탄신다례’와 ‘작헌례(酌獻禮)’가 명기되어 있다. 그리고 탄신다례 때에는 『태상지』에서 술을 준비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렇게 진전다례는 왕가(王家)의 사적인 의식으로 거행되었지만 정조와 고종의 경우 부분적이지만 진전 다례에 신하들을 참예시키거나 관리들을 집사자로 정하기도 하였다.

절차 및 내용

진전다례의 의식 절차는 『승정원일기』에 실려 있다. 국왕의 친행 다례 절차를 보면 사배례(四拜禮)→삼상향(三上香)→연헌삼작(連獻三爵)→사배례의 순서로 되어 있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국왕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판위로 나아가 네 번 절을 올리는 사배례를 행하였다. 다음으로 관세(盥洗) 후 제1실 준소(尊所)로 나아가 작(爵)에 술 따르는 것을 살핀 후 신실 안으로 들어가 신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세 번 향을 올리는 삼상향 후 이어서 술잔을 세 번 연속해서 올리는 연헌삼작을 한 뒤 다시 사배례를 하였다. 이와 같이 다례는 매우 간략한 의례이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민속에서 다례는 명절날 지내는 차례를 가리킨다. 이 차례 역시 차를 올린다기보다 명절날 부모에게 간략히 지내는 제사의 일종이다. 유교의 조상 제례는 사시제를 정례(正禮)로 간주하였는데 차례는 그보다 격식이 자유로우면서도 간략한 제향으로 인식되어 민간에서 널리 전파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태상지(太常志)』
  • 부경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조선시대 궁중다례의 자료 해설과 역주』, 민속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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