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전(璿源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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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에서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영정을 봉안하던 전각.

개설

조선전기에는 왕마다 별도의 사당을 짓고 여기에 왕과 왕비의 영정과 위패를 두고 제사를 지냈다. 세종 때 이르러 이를 유교적 제사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영정을 보관하는 건물인 선원전과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문소전(文昭殿)을 경복궁 안에 건립하였다. 이후부터 왕과 왕비의 영정을 그리면 사후에 이를 궤 안에 넣어 선원전에 보관하였다.

조선후기에는 흩어진 선왕의 어진을 수습하여 세조의 잠저(潛邸)에 모시고 남별전이라 일컫다가, 숙종 때 이를 영희전(永禧殿)으로 고쳐 부르면서 정식 진전(眞殿)으로 확립하였다. 숙종 때는 영희전 외에 궁궐 안에 다시 선원전을 두어 숙종의 어진을 보관하였다. 그러다 숙종 사후에 경종이 숙종의 어진을 펴서 벽 위에 걸고 의례를 거행하게 되면서 선원전 또한 정식 진전이 되었다.

조선전기의 선원전이 『선원보략(璿源譜略)』 등과 함께 어진을 보관하던 장소였다면, 조선후기의 선원전은 적어도 경종대에는 진전으로 정립되어 대한제국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위치 및 용도

구(舊)선원전은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서북쪽에 위치하였다. 원래 도총부(都摠府)가 있던 자리에 1695년(숙종 21) 경덕궁 춘휘전(春暉殿)을 옮겨 이름을 선원전으로 고쳤다. 여기에 어진(御眞)을 봉안함으로써 진전으로서의 기능을 다시 수행하게 되었다. 신실(神室) 7실을 갖춘 정면 9칸, 측면 4칸 규모의 건물로 신실 내부에는 원래 태조·숙종·영조·정조·순조·익종·헌종 등 7조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인 1921년에 대보단(大報壇)을 허물고 경운궁 선원전을 옮겨다가 새로 선원전을 증설할 때 어진을 새 건물에 옮겨 봉안하였다. 그 뒤 빈 건물로 변했으며 훗날 구선원전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원(元)선원전이라고 불러야 옳다.

신(新)선원전은 창덕궁 서북쪽 맨 뒤에 위치하였다. 1921년 경운궁 선원전을 옮기고 여기에 신실 5칸을 증설하여 새로 지었다. 신실 12칸을 갖춘 정면 14칸, 측면 4칸 규모의 웅장한 건물이다. 신실에는 제1실부터 제12실까지 차례대로 태조·세조·원종·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익종)·헌종철종·고종·순종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었다. 어진은 1950년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옮겼다가 화재로 모두 불타 없어졌다.

변천 및 현황

조선초기에 처음 세워진 선원전은 진전으로만 사용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 아니었다. 선왕의 어용과 선원록을 동시에 봉안하도록 지은 건물이었다. 1444년(세종 26)에 세종은 자신과 왕비의 영정은 물론 태조와 태종의 어진을 새롭게 그리게 하여 선원전에 보관하게 하였다(『세종실록』 26년 10월 22일). 1451년(문종 1) 문종과 단종의 보와 죽책 등을 선원전에 보관하였고(『문종실록』 1년 3월 20일)(『단종실록』 즉위년 6월 22일), 1458년(세조 4)에는 선원전에 봉안되어 있는 어진을 대내로 가져다가 봉심(奉審)하였다. 1466년에는 종묘와 영녕전(永寧殿)에서 보관하던 고명(誥命)을 선원전으로 옮겼다. 1469년(예종 1)에는 환조 이하의 영정 33함을 모두 대내로 들여오게 하였다(『예종실록』 1년 6월 27일). 성종은 세조, 예종,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영정을 새로 그려 선원전에 봉안하게 하면서 신숙주(申叔舟)로 하여금 「영모록(永慕錄)」이라는 글을 짓게 하였다. 이 글에서 당시 선원전의 어진 봉안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즉, 봉심절목에 있어서 순서는 알 수 있지만 태종 이상은 오래되어 누구의 영정인지 알 수조차 없다고 하였다. 1506년(연산군 12)에는 개성 목청전(穆淸殿)의 태조 어진을 선원전으로 옮겼으며, 1513년(중종 8)에는 왕이 선원전에 가서 어진을 직접 봉심하기도 하였다. 1551년(명종 8)에는 대전(大殿), 자전(慈殿), 공의왕대비전(恭懿王大妃殿), 중전(中殿) 등 4전이 선원전에 가서 영정을 봉심하였다(『명종실록』 6년 9월 24일).

한편, 명종대의 선원전 상황에 대하여 종부시(宗簿寺) 제조(提調)로서 선원전을 관리했던 홍섬(洪暹)이 왕 앞에서 말한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명종실록』 3년 10월 10일). 이에 따르면 선원전은 사면이 두꺼운 벽으로 막힌 감실형 건물로, 문은 있으나 창이 없어서 통풍은 물론 채광조차 안 되는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바닥도 전돌 위에 마루를 깐 것이어서 습기를 제거할 방법이 없는 상태였다. 어진 보관 시설인 선원전과 달리,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고 의례를 행하던 경기전(慶基殿)은 선원전 시설과는 달랐다. 경기전은 건물의 전면과 좌우 측면 앞 툇간을 문살 창호로 하되 바닥은 전돌로 하여 통풍과 채광을 원활하게 하였다. 또 가운데 감실(龕室)의 전면은 장막으로 가리고 좌우 측면 앞쪽에 문살 창호를 달았다. 바닥에는 온돌을 깔아 습기를 제거하도록 하였다.

조선전기 경복궁 내에 있던 선원전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경복궁과 함께 소실되었다. 조선후기에 선원전이 다시 마련된 것은 1695년(숙종 21)의 일로 창덕궁 내 춘휘전을 선원전으로 개명하고 숙종의 어진을 봉안한 데서 비롯되었다.

숙종 이후 순종까지 200여 년간 역대 왕들은 생전에 어진을 제작하여 보관하게 하였다. 강화부장녕전(長寧殿)에 숙종의 어진을 봉안하고, 만녕전(萬寧殿)과 경희궁태녕전(泰寧殿), 창덕궁선정전(宣政殿)에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였으며, 창덕궁주합루(宙合樓)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는 등 일정한 장소에다 궤 속에 넣어 보관하게 하였다. 왕은 선왕(先王)의 어진을 꺼내어 전 내 벽 위에 걸고 제사와 차례를 거행하였다.

창덕궁 선원전에는 숙종 재위 시부터 숙종의 어진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숙종 사후 1년 만인 1725년(영조 1)에 중수되었다. 이때까지도 숙종 어진만을 봉안하였으므로 신실(神室)은 1칸뿐이었다. 영조 사후 1778년(정조 2)에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하여 내전 전배실로 쓰던 동변실(東邊室)을 제2실로 개조하고, 좌우에 익각(翼閣)을 건설하였다. 익각의 동쪽은 내전(內殿)이 전배(展拜)하는 곳이고, 서쪽은 중배설청(中排設廳)이었다. 정조 사후 1802년(순조 2)에는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하여 다시 신실 1칸을 더 만들었다. 그 결과 정면 5칸(가운데 3칸은 신실, 좌우 툇간은 협실(夾室)), 측면 3칸 규모로 확장되었다. 이 시기 선원전의 모습은 1828년(순조 28) 여름에서 1830년(순조 30)에 제작된 「동궐도(東闕圖)」에 잘 그려져 있다.

순조 사후인 1836년(헌종 2)에는 순조 어진과 익종 어진을 봉안해야 할 상황에서 선원전을 중건하지 않고 경우궁(景祐宮) 성일헌(誠一軒)에 봉안하였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846년(헌종 12)에 신실 2칸을 더 지어 제4실에 순조 어진, 제5실에 익종 어진을 봉안하였다. 이로써 규모는 신실 5칸, 정면 7칸 건물로 확장되었다(『헌종실록』12년 8월 6일). 헌종 사후 1851년(철종 2)에 다시 신실 1칸을 증건하여 제6실로 삼고 헌종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철종 사후, 철종의 어진은 창덕궁 주합루에서 천한전(天漢殿)으로 옮겨 봉안되었고, 선원전은 증건되지 않았다. 고종대 헌종의 어진은 선원전 내에 말아서 보관하였다가, 1875년(고종 12)에 천한전에 봉안되어 있던 철종 어진과 함께 경모궁(景慕宮) 망묘루(望廟樓)로 옮겨졌다[『고종실록』12년 11월 25일 2번재기사]. 고종은 헌종이 아니라 순조의 아들인 익종의 대통(大統)을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1865년(고종 2)부터 1868년(고종 5) 사이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복궁 내에도 선원전이 세워졌는데, 이때 당연히 창덕궁 선원전과 같은 규모로 지어졌다. 경복궁 중건 공사가 낙성되자, 고종은 창덕궁 선원전에 나가서 어진을 모셔다 경복궁 선원전에 옮겨 놓고 나서 헌작례(酌獻禮)를 올렸다(『고종실록』 5년 7월 18일). 경복궁이 중건되고 나서는 창덕궁과 경복궁 두 곳에 같은 규모의 선원전이 있게 되었으므로 왕이 두 궁궐을 옮겨 다닐 때마다 어진도 함께 옮겨 봉안되었다.

1896년(고종 33) 아관파천 뒤에 고종이 경운궁에 머무르게 되자, 제6실 어진을 경운궁 별당으로 이봉했다. 1897년(광무 1)에는 경운궁에도 선원전이 지어지면서 이곳에 어진을 봉안하였다. 즉, 대한제국기에는 창덕궁, 경복궁, 경운궁 3곳에 선원전이 모두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에는 천자의 의절(儀節)에 맞추어 제기와 의장을 마련하였다(『고종실록』 34년 10월 20일). 이전에는 경운궁 선원전 제1실을 비워 두었으나(『고종실록』 36년 12월 31일) 1900년(광무 4)에는 태조 고황제의 어진을 새로 모사하여 봉안하였다(『고종실록』 37년 5월 18일). 이어서 경복궁과 창덕궁의 선원전에도 태조 고황제 어진을 봉안할 제1실을 증건하게 하였다. 그 결과 세 궁궐의 선원전은 모두 신실 7실을 갖추고 정면 9칸, 측면 4칸인 규모로 확장되었다. 이때 선원전 일곽의 평면 구성은 경복궁은 「북궐도형(北闕圖形)」, 창덕궁은 「동궐도형(東闕圖形)」에서 각각 확인할 수 있으며, 『궁궐지(宮闕志)』에도 건물의 칸수와 규모가 기록되어 있다.

형태

1900년에 신실 7실, 정면 9칸 규모로 변경된 경복궁 선원전의 모습은 증건 당시에 작성된 『경복궁창덕궁재일실증건도감의궤(景福宮昌德宮第一室增建都監儀軌)』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1907년(융희 1) 무렵에 작성된 「동궐도형」에서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주위 일곽에는 어진을 잠시 옮겨 봉안할 때 사용하던 이안청인 양지당(養志堂), 의례를 거행하던 내재실(內齋室), 전물을 진설하던 동·서 진설청(陳設廳)이 남아 있다. 경복궁에 있었던 선원전의 규모에 대해서는 『궁궐지』에, 경운궁에 있었던 선원전의 규모에 대해서는 1901년(광무 5)에 나온 『진전중건도감의궤(眞殿重建都監儀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경운궁 선원전은 1900년의 화재로 소실되었고, 1901년에는 터를 바꾸어 영성문(永成門) 서편에 재건되었다. 이곳이 바로 최근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 신축 부지로 결정되어 물의를 일으켰던 곳이다. 당시 선원전의 건물 구성에 대해서는 『진전중건도감의궤』에 자세히 나와 있다.

1901년에 세워진 경운궁 선원전은 불행히도 일제 강점기인 1920년에 헐려 창덕궁 내로 옮겨져 이른바 ‘신(新)선원전’을 짓는 데 활용되었다. 경복궁 선원전도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수록된 사진으로만 확인될 뿐, 일제에 의하여 철거되었다. 창덕궁 선원전은 ‘신선원전’이 들어서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 결과 1920년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창덕궁에만 구(舊)선원전과 신선원전이 병존하고 있다.

1921년 이후부터 신선원전에 옮겨져 봉안되었던 어진은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되었다가 대부분 소실되어 오늘날에는 어진마저 대부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창덕궁 내 두 선원전은 어진이 없이 비어 있으며, 특히 구선원전의 내부에는 신실에도 아무런 의장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신선원전을 지을 때 모두 옮겨진 듯하다. 신선원전에도 어진은 봉안되어 있지 않으나, 신실을 구성하던 어좌·신의·병풍 등의 기물과 의장 일부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복궁창덕궁재일실증건도감의궤(景福宮昌德宮第一室增建都監儀軌)』
  • 『궁궐지(宮闕志)』
  • 『궁내부래안(宮內府來案)』
  • 『진전중건도감의궤(眞殿重建都監儀軌)』「동궐도형(東闕圖形)」「북궐도형(北闕圖形)」
  • 이강근, 「조선후기 선원전의 기능과 변천에 관한 연구」, 『강좌미술사』3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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