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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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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8년(명종 3)∼1618년(광해군 10) = 71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이다. 자는 응구(應久), 호는 몽은(夢隱)·수은(睡隱)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호조 [[참판(參判)]]에 증직된 최력(崔櫟)이며,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서릉령(西陵令)이희철(李熙哲)의 딸이다. 한편 『상촌집(象村集)』 권28「관찰사 최공 신도비명(觀察使崔公神道碑銘)」에는 어머니가 선파(璿派: 종실)에서 나왔는데, 희릉영(熙陵令)이석(李晳)의 딸이라고 하였다. 증조부는 이조 [[참의(參議)]]최해(崔瀣)이고, 조부는 형조 참의에 추증된 최희증(崔希曾)이다. 인조의 계비(繼妃) 장렬왕후(莊烈王后)양주조씨(楊州趙氏)의 외조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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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8년(명종 3)∼1618년(광해군 10) = 71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이다. 자는 응구(應久), 호는 몽은(夢隱)·수은(睡隱)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호조 [[참판(參判)]]에 증직된 최력(崔櫟)이며,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서릉령(西陵令)이희철(李熙哲)의 딸이다. 한편 『상촌집(象村集)』 권28「관찰사 최공 신도비명(觀察使崔公神道碑銘)」에는 어머니가 선파(璿派: 종실)에서 나왔는데, 희릉영(熙陵令)이석(李晳)의 딸이라고 하였다. 증조부는 이조 [[참의(參議)]]최해(崔瀣)이고, 조부는 형조 참의에 추증된 최희증(崔希曾)이다. 인조의 계비(繼妃) 장렬왕후(莊烈王后)양주조씨(楊州趙氏)의 외조부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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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류재집(四留齋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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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집(松巖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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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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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포집(秋浦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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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집(訒齋集)』     
 
*『인재집(訒齋集)』     

2018년 1월 9일 (화) 22:52 기준 최신판




총론

[1548년(명종 3)∼1618년(광해군 10) = 71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이다. 자는 응구(應久), 호는 몽은(夢隱)·수은(睡隱)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호조 참판(參判)에 증직된 최력(崔櫟)이며,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서릉령(西陵令)이희철(李熙哲)의 딸이다. 한편 『상촌집(象村集)』 권28「관찰사 최공 신도비명(觀察使崔公神道碑銘)」에는 어머니가 선파(璿派: 종실)에서 나왔는데, 희릉영(熙陵令)이석(李晳)의 딸이라고 하였다. 증조부는 이조 참의(參議)최해(崔瀣)이고, 조부는 형조 참의에 추증된 최희증(崔希曾)이다. 인조의 계비(繼妃) 장렬왕후(莊烈王后)양주조씨(楊州趙氏)의 외조부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576년(선조 9) 사마시(司馬試)에 진사로 급제하고, 1585년(선조 18) 35세에 별시(別試)문과(文科)에 1등으로 장원 급제하였다.(『방목』) <종계변무(宗系辨誣)>가 이루어진 것을 축하하여 과거를 시행하였는데, 초시(初試)에 3백 명을 뽑고, 그 해 10월에 별시에서 주문(主文)이산해(李山海) 등이 경서(經書) 강독을 통하여 최철견 등 12명을 뽑았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9 참고.) 성균관 전적(典籍)에 보임되었다가,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거쳐 형조 좌랑으로 승진되었다. 그 뒤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가, 병조 좌랑(佐郞)으로 옮겼으며, 외직으로 나가서 대동 찰방(大同察訪)을 역임하였다.(『상촌집』 권28「관찰사 최공 신도비명」 참고. 이하 「최철견 비명」으로 약칭함.)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이 되었다가, 1590년(선조 23) 다시 병조로 들어가 병조 정랑(正郞)이 되었다. 그때 동지사(冬至使)정사위(鄭士偉)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가 책력(冊曆)을 받아 가지고, 이듬해 돌아와서 그 책력을 서운관(書雲觀)에 전해 주었다. 그런데, 1591년(선조 24) 2월 선조가 노하여,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책력을 주는 것은 곧 옛날에 정조(正朝)에 반사(頒賜)하던 것과 같은 것이니, 그 의의가 매우 중요하다. 동지사정사위와 서장관최철견이 그 책력을 받아다가 곧바로 하인들에게 전해주고, 빈손으로 와서 임금에게 복명하였으니, 두 사람을 아울러 추고(推考)하라.” 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 참고.) 중국의 천자는 책력을 해마다 반포하고 그 책력을 이웃나라에 보내 사용하게 하여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Chinese World Order)'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1592년(선조 25)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는데, 그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왜적이 물밀듯이 전라도로 쳐들어왔다. 전라도관찰사이광(李洸)이 군사 10만 명을 거느리고 왜적과 싸우다가 궤멸되었으나, 전라도도사최철견은 전주(全州)의 사민(士民)들과 함께 사력을 다해 싸워서 마침내 전주를 지켰다. 이광은 파직되고, 권율(權慄)이 대신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자, 그는 권율을 받들고 전라도 지역에 왜적이 침입하는 것을 막았다. 관찰사권율은 곧 원수(元帥)로 승진하여, 전라도 군사를 이끌고 서울을 구원하기 위하여 북상하였는데, 도사최철견도 이에 참여하려고 하였으나, 권율은 최철견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南原)을 지켜서, 전라도를 보호하라고 부탁하였다.

그때 최철견은 명나라 참장(參將)낙상지(駱尙志)와 함께 남원을 끝까지 지켰을 뿐만 아니라, 후퇴하는 왜적을 추격하여 크게 소탕하여 전라도 지방을 보전할 수 있었다. 또 최철견은 전라도 지방에서 군량미를 크게 모아서 원수권율의 진영(陣營)으로 보내어, 권율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대첩(大捷)을 거두도록 도와주었다. 그 뒤에 권율은 <임진왜란> 때 전공(戰功)을 세운 사람들을 거론할 때마다 반드시 ‘최철견’이라 하고, 그의 공을 첫 번째로 꼽았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8월 전쟁의 공훈으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되고, 풍저창 수(豐儲倉守)를 겸임하였다.(「최철견 비명」 참고.) 1593년(선조 26) 광주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되었다가, 1597년(선조 30) 수원 부사(水原府使)에 임명되었다. 1599년(선조 32) 7월 조정으로 들어와서 내자시(內資寺)정(正)이 되었고, 11월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가 그달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선조실록』 참고.) 1600년(선조 33) 1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이 되었다가, 그달 사간원 사간으로 옮겨서,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겸임하였다. 체직되었다가 예빈시(禮賓寺) 정이 되었는데, 그때 최철견이 시폐(時弊)를 상언(上言)하니 선조가 가납(嘉納)하였다. 얼마 안 되어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고, 1600년(선조 33) 8월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고,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하고, 곧 대사헌이 되었다.(「최철견 비명」 참고.)

1601년(선조 34) 6월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가, 1602년(선조 35) 2월 호조 참의가 되었다. 1604년(선조 37) 10월 춘천부사(春川府使)에 임명되었으나, 1606년(선조 39) 2월 강원도 암행어사박안현(朴顔賢)이 보고하기를, “춘천 부사최철견은 민사(民事)를 돌보지 않고 오로지 자봉(自奉)하기에만 힘쓰므로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며, 아전들을 검속하지 않아서 심지어 언문 첩자(貼子)까지 나돈다고 합니다.” 하였으므로, 파직당하여 집으로 돌아왔다.(『선조실록』 참고.)

1608년(선조 41) 2월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였는데, 풍수가(風水家)의 말 때문에 오래도록 산릉(山陵)의 터를 잡지 못하자, 최철견이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부당함을 상소하니, 마침내 조정의 논의가 결정되었다.(「최철견 비명」 참고.) 광해군 시대 신병(身病)으로 인하여거의 10여 년 동안 칩거(蟄居)하다가, 1618년(광해군 10) 겨울 끝내 지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71세였다.

저서로는 『몽은집(夢隱集)』이 있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 도사 최철견의 활동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적이 전라도를 공격하였다. 전라도관찰사이광은 전라도 군사 10만 명을 거느리고 왜적과 싸우다가 궤멸되었다. 이때 전라도 도사최철견은 의분을 참지 못하여 전주의 사민들을 모아놓고 고하기를, “왜적이 서울로 들어가니, 주상은 서쪽으로 파천(播遷)하였다. 호남 지방의 한 모퉁이 전주만이 온전한데, 우리가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갈 것인가.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나를 이곳에 묻어 달라.” 하고, 전주의 군민(軍民)들과 함께 사력을 다해 싸워서 마침내 전주를 지켰다.

조정에서 이광을 문책하고 권율을 그 후임으로 삼았다. 그는 권율을 받들고 전라도 지역에 왜적이 침입하는 것을 막았다. 관찰사권율은 곧 원수로 승진하여, 전라도 군사를 이끌고 서울을 구원하기 위하여 북상하였는데, 이정암(李廷馣)이 그 후임으로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도사최철견은 권율의 군사를 따라가지 않고 전라도에 남아서 새 관찰사와 함께 전라도 지방을 방어하였다.

마침 왜적이 전라도 남원 지방으로 침입하였으므로, 최철견은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을 지켰다. 그때 중국 명나라 참장낙상지가 순천(順天)에서 진주(晉州)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남원으로 와서 최철견의 군사와 합류하였다. 왜적의 기병(騎兵)들이 이웃 고을을 공략하자, 남원 사람들이 술렁이며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나갔다. 한 역관(譯官)이 최철견에게 몸을 피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최철견은 전혀 흔들리지 않자, 참장낙상지가 그의 충의(忠義)에 감탄하였다. 최철견이 낙상지와 약속하고 외진(外陣)을 설치하고, 군병을 보내서 돌아가는 왜적을 추격하여 크게 소탕하였다. 그리하여 전라도 남원이 보전될 수 있었다. 또 최철견이 전라도 지역의 군량미를 대대적으로 운송하여 원수권율의 군영에 보내니, 군사들의 사기를 더높혔다.

이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자, 선조가 그 공을 포상하여 1592년(선조 25) 8월 전라도 도사최철견의 자품(資品)를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올렸다.(『선조실록』 참고.) 그때 그를 시기하는 반대파가 이를 막았다. 9월에 비변사(備邊司)가 아뢰기를, “처음에 전주성을 지키고 적을 퇴각시킨 것을 최철견의 공으로 알고 포상하여 당상(堂上)의 품계에까지 오르게 하였습니다. 이제 듣건대, 왜적의 기병이 많지 않았고, 성을 지킨 것도 바로 그 지방 사람인 이정란(李廷鸞)의 공이었습니다. 최철견의 당상으로 가자(加資)한 것을 개정하고 그의 관직만 높이도록 하소서.” 하였다. 선조가 그대로 따라서, 통정대부의 품계를 거두고, 전라도 도사로서 풍저창 수(豐儲倉守)를 겸임하게 하였다.(「최철견 비명」·『선조실록』 참고.) 그러나 원수권율은 <임진왜란> 때 국사에 사력(死力)을 다한 사람들을 거론할 때마다 반드시 ‘최칠건’이라 하고 그를 추천하였다.

1592년(선조 25) 10월 체찰사(體察使)정철(鄭澈)이 전라도도사최칠견에게 급히 글을 보내기를, “흉악한 왜적들이 수원 땅에 가득하여, 날마다 싸우지 않을 때가 없다. 한 도의 주장(主將)이 바야흐로 적병의 포위 속에 있는데, 사방을 돌아보아도 구원병이 없으니, 전라도의 관군과 의병을 빨리 보내어 수원성의 군사를 구원하라.”하였다. 최철견이 의병장(義兵將) 변사정(邊士貞)·임희진(임희진) 등에게 의병을 거느리고 달려가서 수원성을 구원하게 하였다.(『난중잡록(亂中雜錄)』 권2 참고.)

성품과 일화

최철견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최철견 비명」 참고.) 그는 키가 8척에 호걸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어서, 누구나 그를 한번 보면, 세상의 호장부(好丈夫)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활기차고 씩씩한 최철견을 보고 묘당(廟堂)에 들어가서 일국의 재상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지방의 방백(方伯)이 되어서 만리 밖에서 공을 세울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외가집에서 자랐는데,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분발해서 글을 익혔고, 조금 성장하자 글을 잘 한다고 이름이 났다. 성품이 편안하고 차분하여, 벼슬에 진취(進取)하는 데에 뜻을 두지 않았고, 평소 재산을 늘리는 데 마음을 두지 않았다. 책 보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고, 문장(文章)이 매우 풍부하여 붓을 잡으면 거침없이 수백 마디의 글을 즉시 써서 내려갔다. 일찍이 승지로 있을 때 선조가 그 문장을 특이하게 여겨서, 그가 누구의 문장을 숭상하는지 묻기까지 하였다.

1600년(선조 33) 8월 최철견이 동부승지에 발탁되었을 때 반대파 사관(史官)이 악평(惡評)하기를, “그는 사람됨이 용렬하고 어리석어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승지에는 합당치가 않았다. 지난번에 임금의 비위를 맞추는 말을 하여, 갑자기 청현직(淸顯職)에 올랐으므로 그를 비루하게 여기는 자가 많았다.” 하였다.(『선조실록』 참고.) 실록의 간주(間注) 형식의 사평(史評)은 실록을 편찬할 때 사관이 짧게 평하여 끼워 넣는 글인데, 당시 당파 싸움의 영향으로 이와 같이 반대파가 악의에 찬 사평을 하였다. 또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601년(선조 34) 8월 사간원이 아뢰기를, “방백은 한 도의 주인이니, 체면이 매우 중합니다. 황해도관찰사최철견은 감히 이러한 때에 공공연하게 잔치를 베풀고, 술에 취해서 위엄스러운 자태를 잃었으며, 심지어 자신이 직접 노래를 부르면서 각 지방의 수령들로 하여금 같이 일어나서 춤을 추게 하여, 그 체모를 훼손하였으니, 그를 파직하소서.” 하니, 선조가 아뢴 대로 파직한 다음에 추고(推考)하도록 하였다.(『선조실록』 참고.)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양주(楊州) 송산(松山)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그의 친구 상촌(象村)신흠(申欽)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상촌집(象村集)』 권28「관찰사 최공 신도비명(觀察使崔公神道碑銘)」)

그의 부인 진주정씨(晉州鄭氏)는 진사 정윤붕(鄭允弸)의 딸인데, 자녀는 3남 4녀를 두었다. 맏이 최행(崔行)은 군수(郡守)이고, 다음 최구(崔衢)는 성균관 전적이며, 막내딸은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조창원(趙昌遠)에게 출가하였다. 조창원의 막내딸이 인조의 계비(繼妃) 장렬왕후(莊烈王后)양주조씨(楊州趙氏)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상촌집(象村集)』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난중잡록(亂中雜錄)』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 『학봉전집(鶴峯全集)』
  • 『사류재집(四留齋集)』
  • 『송암집(松巖集)』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추포집(秋浦集)』
  • 『인재집(訒齋集)』
  • 『유재집(游齋集)』
  • 『이재유고(頤齋遺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