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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39 판




총론

[1516년(중종11)∼1590년(선조23) = 75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정중(正仲)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종부시(宗簿寺)정(正)성희주(成希周)이고, 어머니 평강채씨(平康蔡氏)는 첨사(僉使)채자심(蔡子深)의 딸이다. 호조 좌랑성완(成玩)의 손자이고, 예조 판서성세장(成世章)의 4촌 동생이다.

명종~선조 시대 활동

나이 10여 세에 이미 경사(經史)에 통달하였으나 20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예에 지나칠 만큼 극진히 상례를 치르다가 학업을 거의 중단하였기 때문에, 과거에 늦게야 응시하게 되었다. 1546년(명종1) 사마시를 거쳐, 1561년(명종16)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또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상례를 끝마치고 나니, 나이가 이미 50세가 되었다. 이때 비로소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고, 성균관 전적 · 공조 좌랑을 거쳐 어천도찰방(魚川道察訪)으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임하였다. 외직으로는 횡성현감(橫城縣監) ·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 · 금산군수(金山郡守) ·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역임하였고, 내직으로는 호조 낭관 · 성균관 사업(司業)과 군기시(軍器寺) · 사재감(司宰監) · 장악원(掌樂院)정(正)을 역임하였다. 좌통례(左通禮)에 임명되었다가,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하여 원주목사(原州牧使)로 나갔고,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로 옮겼다가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아서 부임하지 못하였다. 1590년(선조23) 5월에 병에 걸려서 자택에서 죽으니, 향년 75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세평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이 엄격하고 말수가 적었다. 평상시에 자신을 예법으로 다스려, 아무리 더운 날씨라도 반드시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 지냈으며, 한 번도 자세나 표정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선(善)을 즐겼고 의(義)를 좋아하였다. 항상 학문을 닦는 일을 가지고 자제들에게 훈계를 하였다. 벼슬살이 할 때에는 세력 있는 자를 억누르고 오래 묵은 송사를 해결하는 데에 일편단심으로 노력하였다. 일을 처리할 때에는 한결같이 정의(正義)에 따랐고, 한 번도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져서 법을 집행한 적이 없었다.

비문과 후손

월사(月沙)이정귀(李廷龜)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월사집(月沙集)』 부록(附錄) 권6) 부인 광주노씨(光州盧氏)는 첨지(僉知)노공좌(盧公佐)의 딸인데, 자녀는 6남 4녀를 두었다. 장남 성락(成洛)은 승지를 지냈고, 3남 성영(成泳)은 이조 판서를 지냈으며 5남 성람(成灠)은 율곡(栗谷)의 문인(門人)으로 좌랑을 지냈다. 성세평이 죽은 다음해인 1591년(선조24) 광국 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책훈되고 대사헌에 증직되었다. 또 3남 성영의 출세로 인하여 종1품하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월사집(月沙集)』
  • 『견한잡록(遣閑雜錄)』
  • 『미암집(眉巖集)』
  • 『사류재집(四留齋集)』
  • 『서애집(西厓集)』
  • 『백곡집(柏谷集)』
  • 『지수재집(知守齋集)』
  • 『성재집(性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