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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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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년(광해군3) 21세에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설서(說書)]]에 보임되었다가 [[사서(司書)]]가 되었고 사간원[[정언(正言)]]으로 전임되었다. 1613년(광해군5) 대북파(大北派)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이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강화도로 유배하였다. 이어 1614년(광해군6)에 영창대군을 죽이려고 하자, 사간원정언정온(鄭蘊)이 광해군에게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역죄인(大逆罪人)으로 몰려서 죽게 되었다. 강대수는 [[간관(諫官)]]으로서 동료 정온을 구하려고 상소를 올렸다가, [[영의정(領議政)]]정인홍에 의하여 회양(淮陽)으로 유배되었다. 정온은 죽음을 면하고 제주(濟州) 대정(大靜)으로 유배되는 데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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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년(광해군3) 21세에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설서(說書)]]에 보임되었다가 [[사서(司書)]]가 되었고 사간원[[정언(正言)]]으로 전임되었다. 1613년(광해군5) 대북파(大北派)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이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강화도로 유배하였다. 이어 1614년(광해군6)에 영창대군을 죽이려고 하자, 사간원정언정온(鄭蘊)이 광해군에게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역죄인(大逆罪人)으로 몰려서 죽게 되었다. 강대수는 [[간관(諫官)]]으로서 동료 정온을 구하려고 상소를 올렸다가, [[영의정(領議政)]]정인홍에 의하여 회양(淮陽)으로 유배되었다. 정온은 죽음을 면하고 제주(濟州) 대정(大靜)으로 유배되는 데에 그쳤다.
  
처음에 강대수의 아버지 강익문은 정인홍과 같은 [[북인(北人)]]이었다. 계축옥사 때, 대북파 정인홍,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을 처형하려고 하자, 전 영의정이덕형(李德馨)이 이것을 반대하니, 정인홍 등이 이덕형을 형률로써 다스리고자 하였다. 이때 강익문은 이를 반대하다가 그 일파의 미움을 사서 충원현감(忠原縣監)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1614년(광해군6)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자, 강익문은 병을 핑계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 아들 강대수의 옥사에 연루되어, 9년 동안 옥(獄)에 갇혀 온갖 고초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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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강대수의 아버지 강익문은 정인홍과 같은 [[북인(北人)]]이었다. 계축옥사 때, 대북파 정인홍,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을 처형하려고 하자, 전 영의정이덕형(李德馨)이 이것을 반대하니, 정인홍 등이 이덕형을 형률로써 다스리고자 하였다. 이때 강익문은 이를 반대하다가 그 일파의 미움을 사서 충원현감(忠原縣監)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1614년(광해군6)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자, 강익문은 병을 핑계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 아들 강대수의 옥사에 연루되어, 9년 동안 옥(獄)에 갇혀 온갖 고초를 겪었다.
  
 
=='''인조~효종 시대의 활동'''==
 
=='''인조~효종 시대의 활동'''==

2018년 1월 9일 (화) 22:41 기준 최신판




총론

[1591년(선조24)~1658년(효종9) = 68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효종(孝宗) 때 활동한 문신. 초명(初名)은 강대진(姜大進)이다. 자는 면재(勉哉)·학안(學顔), 호는 춘간(春磵)·한계(寒溪)· 한사만은(寒沙晩隱)·정와(靜窩)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인데, 5대조 강승전(姜承顓)이 합천(陜川)으로 이사하여 대대로 살았다.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강익문(姜翼文)의 아들이고, 장현광(張顯光)의 문인(門人)이다.

광해군 시대 계축옥사

1611년(광해군3) 21세에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설서(說書)에 보임되었다가 사서(司書)가 되었고 사간원정언(正言)으로 전임되었다. 1613년(광해군5) 대북파(大北派)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이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강화도로 유배하였다. 이어 1614년(광해군6)에 영창대군을 죽이려고 하자, 사간원정언정온(鄭蘊)이 광해군에게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역죄인(大逆罪人)으로 몰려서 죽게 되었다. 강대수는 간관(諫官)으로서 동료 정온을 구하려고 상소를 올렸다가, 영의정(領議政)정인홍에 의하여 회양(淮陽)으로 유배되었다. 정온은 죽음을 면하고 제주(濟州) 대정(大靜)으로 유배되는 데에 그쳤다.

처음에 강대수의 아버지 강익문은 정인홍과 같은 북인(北人)이었다. 계축옥사 때, 대북파 정인홍,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을 처형하려고 하자, 전 영의정이덕형(李德馨)이 이것을 반대하니, 정인홍 등이 이덕형을 형률로써 다스리고자 하였다. 이때 강익문은 이를 반대하다가 그 일파의 미움을 사서 충원현감(忠原縣監)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1614년(광해군6)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자, 강익문은 병을 핑계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 아들 강대수의 옥사에 연루되어, 9년 동안 옥(獄)에 갇혀 온갖 고초를 겪었다.

인조~효종 시대의 활동

강대수는 1629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풀려나서 다시 기용되었다. 1623년(인조1) 호조(戶曹)·예조(禮曹)의 정랑(正郞)을 거쳐서, 다음해 사간원정언에서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으로 옮기고,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정경세(鄭經世)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영남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경상도 의병(義兵)을 모았으나, 오랑캐와 화친(和親)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그는 의병들을 해산하였다. 그해 사간원사간으로 승진하였고, 1628년(인조6) 순천도호부사(順天都護府使)로 나가서 3년 만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1631년(인조9)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부수찬(副修撰)에서 수찬(修撰), 교리(校理)를 거쳐 부응교(副應敎)로 승진하였다. 군자감(軍資監)·제용감(濟用監)정(正)을 역임하고, 1635년(인조13) 암행어사(暗行御史)로서 호서(湖西: 충청도) 지방을 염문(廉問)하여 수령으로서 법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파직시켰다. 1638년 남원부사(南原府使)로 나갔다가, 다음해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 인조(仁祖) 말년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다. 효종(孝宗) 때 61세로 전주부윤(全州府尹)에 임명되었으나, 1년 만에 어머니가 늙었다하며 관직에서 물러났다. 고향 합천으로 돌아가서 7년 동안 은거하다가 죽으니, 향년 68세였다. 문집으로는 『한사집(寒沙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강대수는 『주역(周易)』을 좋아하여 날마다 괘(卦) 하나씩을 외우고, 그 뜻을 깊이 생각하며 음미(吟味)하였다고 한다. 또 집에다 석천서재(石泉書齋)를 지어놓고 배우려는 자는 누구든지 글을 가르쳤으며, 지방 유생들을 위하여 이연서원(伊淵書院)과 덕곡서원(德谷書院)을 지었다.

묘소와 제향

묘소는 경상도 의령(宜寧)의 낙동강(洛東江) 서쪽이며, 허목(許穆)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경상도 합천의 도연서원(道淵書院)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한사집(寒沙集)』
  • 『일두집(一蠹集)』
  • 『동계집(桐溪集)』
  • 『용주유고(龍洲遺稿)』
  • 『태계집(台溪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미수기언(眉叟記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