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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년(명종 10) 5월 왜구가 전라도 해안 지역인 영암, 진도, 장흥 일대에 침입하여 약탈과 노략질을 한 사건. 일명 을묘지변(乙卯之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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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년(명종 10) 왜구가 전라도 남부 지역에 침입하여 노략질한 사건.
  
 
=='''개설'''==
 
=='''개설'''==
  
삼포왜란(三浦倭亂), [[사량진왜변(蛇梁津倭變)]] 이후 조선이 왜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왜구가 1555년 5월 전라도 해안인 영암 지역에 대규모로 상륙하여 달량성을 함락하고 이어 진도, 장흥, 영암 등지를 침입하여 약탈하였다. 그러나 영암성 공방전에서 조선군이 왜구를 격파하고 이어 중앙에서 파견된 토벌군의 반격으로 왜구는 흩어져 도주하였다. 이 왜변을 계기로 [[비변사(備邊司)]]를 상설 기구화하였으며, 왜구가 운용한 견고한 대형 함선과 [[총통(銃筒)]]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은 [[천자총통(天字銃筒)]] 등 대형화포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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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4년(중종 39)에 발생한 사량진왜변 이후 명종 말년까지 30여 차례 왜구의 침입이 있었으며, 그중 가장 규모가 컸던 사건이 전라남도 영암·강진·진도 일대와 제주도를 침입한 을묘왜변(乙卯倭變)이었다.
  
=='''내용 및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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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
  
1510년(중종 5) 5월에 일어난 삼포왜란을 계기로 조선은 왜인들과 1512년 [[임신약조(壬申約條)]]를 체결하여 통제와 단속을 강화하였다. 그 후 1544년(중종 39) 5월 왜구가 사량진왜변을 일으키자 조선은 이를 계기로 [[정미약조(丁未約條)]]를 맺어 일본 측에 대해 무역선인 [[세견선(歲遣船)]]을 감축하고 교역량을 줄이고 왕래하는 왜인들에 대한 통제와 단속을 강화하였다. 이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대마도(對馬島) 등지의 왜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1555년 5월 11일 왜구의 선단 60여 척이 명나라 해안 지역을 약탈하고 귀환하던 중 조선 해안을 침입하였다. 이들은 전라도영암의 달량포(達梁浦)와 이진포(梨津浦)를 연하는 해안에 상륙하여 약탈하고 달량성에 대한 포위 공격을 개시하였다. 가리포첨사이세린(李世麟)의 보고를 받은 절도사원적(元績) 등은 구원병을 거느리고 달량성에 출동하여 방어에 임하였다. 그러나 병력의 현격한 열세 등으로 인하여 성은 함락되고 절도사원적과 장흥부사한온(韓蘊)은 전사하고 영암군수이덕견(李德堅)은 왜구의 포로가 되었다. 달량성을 수중에 넣은 왜구는 인근의 어란포(於蘭浦)로 진출하여 전라우수사김빈(金斌)이 지휘하는 전라도 수군을 격파하고 진도 방향으로 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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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부는 삼포왜란과 사량진왜변 등 변란이 있을 때마다 왜인들의 세견선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이에 왜인들이 교역 규모가 줄어들고 생활필수품이 부족해지자 통교의 확대를 요청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응하지 않았다. 1544년(중종 39)일어난 사량진왜변을 계기로 조선은 대마도인의 통교를 금지하였다. 그 후 대마도주의 사죄와 통교 재개 요청을 받아들여 1547년(명종 2) 정미약조를 맺고 다시 통교를 허용하였는데, 이전보다도 대마도의 통교에 대한 규정이 더욱 강화되었다.
  
5월 16일 위급한 상황을 보고받은 조선 조정에서는 호조 판서이준경(李浚慶)을 도순찰사로, 남치근(南致勤), 김경석(金景錫)을 전라좌·우도방어사로 각각 임명하고 [[금군(禁軍)]] 등 서울의 정예 군사를 동원하였다. 아울러 산직(散職) 무신과 [[한량(閑良)]], 공사천(公私賤) 등으로 토벌군을 편성하였다. 왜구는 5월 21~22일에 걸쳐 전라도 병영과 장흥부에 침입하여 약탈하였고, 이어서 24일에는 영암으로 진출하여 영암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영암성 군민들의 저항으로 왜구는 성을 함락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조선군의 추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 뿔뿔이 흩어져 패주하였다. 영암성 공방전을 벌이는 동안 좌도방어사남치근과 전라병사조안국이 토벌군을 이끌고 영산진(靈山津)으로 진격하여 왜구와 대치하였고 이어 영암성 공방전을 계기로 전세가 역전되자 강진과 영암을 잇는 요충인 곡천(鵠川) 방면으로 왜구를 추격하여 이들을 완전히 축출하고 왜변을 종결하였다. 왜구는 퇴각하는 길에 녹도(鹿島)를 습격한 데 이어 6월 27일에 제주도를 습격했으나, 상륙한 왜구를 목사김수문(金秀文)이 군사를 이끌고 격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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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은 호족들이 세력 다툼을 하던 전국시대로, 국내 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워 실정막부(室町幕府, [무로마치 바쿠후])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일본 서부 지방에 사는 연해민들이 조선과 명나라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아 국제 관계가 순탄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 관계가 원활하지 못한 데다, 혼란한 일본의 국내 정세 속에서 왜구가 조선의 연안을 대규모로 침입하여 약탈한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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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
  
조선은 을묘왜변을 계기로 종래 변경 지역의 변란에 대비하기 위해 임시 기구로 운영해오던 비변사를 상설 기구로 전환하였다. 한편 을묘왜변을 진압하고 나서 조선은 왜구에 대한 금압정책을 강화하였다. 이에 조선으로부터 임신약조와 정미약조의 통제 규정을 완화하려는 외교적 의도에서 일본의 막부와 대마도 도주 측에서는 조선의 해역을 침입한 왜구를 체포하여 조선에 압송하기도 하고 왜구의 활동 상황을 조선에 통보하는 조선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조선 조정은 1557년 왜인들의 집요한 요청을 받아들여 왜구의 침약이 재발할 경우 허용 조건을 취소한다는 단서를 붙인 상태에서 세견선을 5척 증가시켜주는 등 왜인들의 활동 제한 규정을 완화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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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부의 통제에 불만을 품은 왜구는 1555년 5월 11일 명나라 해안에서 노략질을 하고 돌아가다가 조선의 해안에 침입하였다. 이들은 70여 척의 병선으로 전라남도 영암의 이진포에서 달량포까지 동서로 나누어 상륙하여 인가를 불태우고 약탈하는 한편 달량성을 포위·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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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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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선 70여 척이 침입하였다는 보고를 접한 전라병사원적(元積)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하여 장흥부사한온(韓蘊), 영암군수이덕견(李德堅)과 함께 군사 200여 명을 거느리고 달량성으로 출동하였다. 조선군이 출동하자 왜구는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가 병력을 늘려 다시 달량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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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을 접한 해남현감[[변협(邊協)]]은 달량포의 사정을 조정에 보고하고 전 무장현감이남(李楠)과 함께 300여 명을 이끌고 달량성으로 출동하여 왜구와 싸웠으나 패하고, 이남은 전사하였다. 5월 13일 왜구가 달량성을 6겹으로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하자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전라병사원적이 화친의 뜻을 담은 글을 왜구의 진영에 보냈으나 왜구는 총공세를 취하여 결국 달량성은 함락되고, 원적과 한온도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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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량성을 점령한 왜구는 이 일대를 약탈한 뒤 어란포(於蘭浦)로 진출하였다. 이에 전라우수군절도사김빈(金贇)과 진도군수최린(崔潾)이 저지하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그 후 왜구는 곧바로 진도의 남도보(男桃堡)와 금갑보(金甲堡)로 진출하였다. 5월 15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조선 정부는 전라도순찰사이준경(李浚慶)을 중심으로 한 토벌군을 편성하였다. 이준경은 전라도의 군비를 점검하고 군진만으로는 왜구를 토벌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사족(士族)]]과 무예에 재능이 있는 자들을 뽑아 토벌군을 증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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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왜구 50여 명이 전라도 병영을 공격하여 병기와 잡물, 증미(蒸米) 70여 석을 약탈하였고, 5월 22일 장흥부를 습격하여 잡물을 약탈하였다. 5월 24일 왜구는 영암향교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다시 영암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튿날인 25일 왜구는 다시 총공격을 개시하였지만 조선군과 영암군민이 일치단결하여 항거하므로 향교로 퇴각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영암향교를 공격하여 100여 명의 왜구를 사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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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가 퇴각하자 전라도좌방어사남치근(南致勤)과 전라병사[[조안국(趙安國)]]이 왜구를 추격하여 전략상 요충지인 곡천(鵠川) 밖으로 쫓아내고 그곳에 진을 설치하였으나, 왜구가 영암성을 다시 공격할 것을 우려하여 철군함으로써 전투는 끝이 났다. 이로써 5월 11일부터 시작된 영암 일대에서의 싸움은 15일 만에 평정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왜구는 가리포·회령포·녹도·근당도에 침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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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7일에는 왜구 1,000여 명이 제주도에 침입한 제2차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이때 제주목사김수문(金秀文)은 효용군(曉勇軍) 70명을 뽑아 적진으로 진격하여 30보의 거리를 두고 대치하다가 김직손(金直孫)·김성조(金成祖)·이희준(李希俊)·문시봉(文時鳳) 등 4명이 말을 타고 돌격하여 왜구를 패퇴시켰고, 정병 김몽근(金夢根)은 적장을 사살하였다. 조선군은 퇴각하는 왜구를 추격하여 많은 왜구를 참획함으로써 2달 동안 계속된 을묘왜변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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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왜변을 일으킨 집단은 일본 구주의 오도(五島)를 본거지로 활동하던 명나라 사람 오봉(五峯: 王直의 호)과 일본 구주 서북부 지역의 왜인이 중심이 되었는데, 이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후기 왜구’와 같은 유형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을묘왜변은 종래에 보았던 왜구나 왜변, 왜란 등과 사건의 중심 세력이나 성격이 전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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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왜변 이후 조선은 대마도주와의 통교를 더욱 제한하였다. 그러자 1555년 10월 대마도주 종의조(宗義調)는 약탈을 자행한 왜구의 목을 잘라 바치며 세견선의 증가를 요청해 왔다. 1556년(명종 11) 10월 일본국왕사 천부(天富)와 현소(玄蘇)가 와서 대마도주의 세견선을 줄인 것과 삼포를 부산포로 합하여 통신과 선박 운행을 불편하게 한 것 10개 조항의 불만을 토로하면서 약조의 개정을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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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7년(명종 12)에는 대마도의 세견1선사선 평강차(平康次)가 도항하여 제포 항로의 개방과 특송선의 접대, 세견선의 증선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은 같은 해 4월 대마도주의 세견선 5척을 늘려 원래의 30척으로 하는 정사약조를 체결하였다.
  
 
=='''의의'''==
 
=='''의의'''==
  
을미왜변을 계기로 조선은 국방체제에 착수하여 비변사를 상설 기구화하고 진관체제에 의한 군사동원 체제를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로 전환하였다. 아울러 일본의 견고한 대형 함선과 총통에 대응하고자 [[판옥선(板屋船)]] 건조와 천자총통 대형화포 제작에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을미왜변 이후에도 왜구의 소규모 침입은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이후 약 40년 동안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임진왜란 발발의 한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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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왜변은 구주의 오도를 본거지로 활동하던 명나라 사람 오봉과 구주 서북부 지역의 왜인이 일으킨 변란이었다는 점에서 종래의 왜변·왜란 등과 성격이 전혀 달랐다. 조선에서는 을묘왜변을 계기로 지방군의 편제를 진관(鎭管) 체제에서 [[제승방략(制勝方略)]]으로 전환하고, 축성과 병기의 보강에 힘쓰는 대일 경계를 강화하였고, 중앙에서는 군국기무를 관장하는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이후 명종 말기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조일 간의 외교 관계는 교역과 왜구가 동시에 진행되는 비정상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이현종, 『조선전기대일교섭사연구』, 한국연구원,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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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토벌사』, 국방군사연구소, 1993.     
*한국군사연구실, 『한국군제사』(근세조선전기편), 육군본부,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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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종, 『조선전기 대일교섭사연구』, 한국연구원, 1964.       
*허선도, 『조선시대화약병기사연구』, 일조각,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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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봉, 『강좌 한일관계사』, 현음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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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하, 「을묘왜변고」, 『탐라문화』 8,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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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익, 「‘후기왜구’로서의 을묘왜변」, 『한일관계사연구』 24,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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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석, 「조선전기 호남의 왜변에 대하여-을묘왜변을 중심으로-」, 『전통문화연구』 3,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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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종, 「조선전기 대일 외교정책 연구-대마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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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4일 (수) 22:03 기준 최신판



1555년(명종 10) 왜구가 전라도 남부 지역에 침입하여 노략질한 사건.

개설

1544년(중종 39)에 발생한 사량진왜변 이후 명종 말년까지 30여 차례 왜구의 침입이 있었으며, 그중 가장 규모가 컸던 사건이 전라남도 영암·강진·진도 일대와 제주도를 침입한 을묘왜변(乙卯倭變)이었다.

역사적 배경

조선 정부는 삼포왜란과 사량진왜변 등 변란이 있을 때마다 왜인들의 세견선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이에 왜인들이 교역 규모가 줄어들고 생활필수품이 부족해지자 통교의 확대를 요청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응하지 않았다. 1544년(중종 39)에 일어난 사량진왜변을 계기로 조선은 대마도인의 통교를 금지하였다. 그 후 대마도주의 사죄와 통교 재개 요청을 받아들여 1547년(명종 2) 정미약조를 맺고 다시 통교를 허용하였는데, 이전보다도 대마도의 통교에 대한 규정이 더욱 강화되었다.

당시 일본은 호족들이 세력 다툼을 하던 전국시대로, 국내 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워 실정막부(室町幕府, [무로마치 바쿠후])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일본 서부 지방에 사는 연해민들이 조선과 명나라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아 국제 관계가 순탄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 관계가 원활하지 못한 데다, 혼란한 일본의 국내 정세 속에서 왜구가 조선의 연안을 대규모로 침입하여 약탈한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발단

조선 정부의 통제에 불만을 품은 왜구는 1555년 5월 11일 명나라 해안에서 노략질을 하고 돌아가다가 조선의 해안에 침입하였다. 이들은 70여 척의 병선으로 전라남도 영암의 이진포에서 달량포까지 동서로 나누어 상륙하여 인가를 불태우고 약탈하는 한편 달량성을 포위·공격하였다.

경과

왜선 70여 척이 침입하였다는 보고를 접한 전라병사원적(元積)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하여 장흥부사한온(韓蘊), 영암군수이덕견(李德堅)과 함께 군사 200여 명을 거느리고 달량성으로 출동하였다. 조선군이 출동하자 왜구는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가 병력을 늘려 다시 달량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해남현감변협(邊協)은 달량포의 사정을 조정에 보고하고 전 무장현감이남(李楠)과 함께 300여 명을 이끌고 달량성으로 출동하여 왜구와 싸웠으나 패하고, 이남은 전사하였다. 5월 13일 왜구가 달량성을 6겹으로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하자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전라병사원적이 화친의 뜻을 담은 글을 왜구의 진영에 보냈으나 왜구는 총공세를 취하여 결국 달량성은 함락되고, 원적과 한온도 전사하였다.

달량성을 점령한 왜구는 이 일대를 약탈한 뒤 어란포(於蘭浦)로 진출하였다. 이에 전라우수군절도사김빈(金贇)과 진도군수최린(崔潾)이 저지하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그 후 왜구는 곧바로 진도의 남도보(男桃堡)와 금갑보(金甲堡)로 진출하였다. 5월 15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조선 정부는 전라도순찰사이준경(李浚慶)을 중심으로 한 토벌군을 편성하였다. 이준경은 전라도의 군비를 점검하고 군진만으로는 왜구를 토벌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사족(士族)과 무예에 재능이 있는 자들을 뽑아 토벌군을 증강하였다.

5월 21일 왜구 50여 명이 전라도 병영을 공격하여 병기와 잡물, 증미(蒸米) 70여 석을 약탈하였고, 5월 22일 장흥부를 습격하여 잡물을 약탈하였다. 5월 24일 왜구는 영암향교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다시 영암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튿날인 25일 왜구는 다시 총공격을 개시하였지만 조선군과 영암군민이 일치단결하여 항거하므로 향교로 퇴각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영암향교를 공격하여 100여 명의 왜구를 사살하였다.

왜구가 퇴각하자 전라도좌방어사남치근(南致勤)과 전라병사조안국(趙安國)이 왜구를 추격하여 전략상 요충지인 곡천(鵠川) 밖으로 쫓아내고 그곳에 진을 설치하였으나, 왜구가 영암성을 다시 공격할 것을 우려하여 철군함으로써 전투는 끝이 났다. 이로써 5월 11일부터 시작된 영암 일대에서의 싸움은 15일 만에 평정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왜구는 가리포·회령포·녹도·근당도에 침입하였다.

6월 27일에는 왜구 1,000여 명이 제주도에 침입한 제2차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이때 제주목사김수문(金秀文)은 효용군(曉勇軍) 70명을 뽑아 적진으로 진격하여 30보의 거리를 두고 대치하다가 김직손(金直孫)·김성조(金成祖)·이희준(李希俊)·문시봉(文時鳳) 등 4명이 말을 타고 돌격하여 왜구를 패퇴시켰고, 정병 김몽근(金夢根)은 적장을 사살하였다. 조선군은 퇴각하는 왜구를 추격하여 많은 왜구를 참획함으로써 2달 동안 계속된 을묘왜변은 끝이 났다.

을묘왜변을 일으킨 집단은 일본 구주의 오도(五島)를 본거지로 활동하던 명나라 사람 오봉(五峯: 王直의 호)과 일본 구주 서북부 지역의 왜인이 중심이 되었는데, 이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후기 왜구’와 같은 유형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을묘왜변은 종래에 보았던 왜구나 왜변, 왜란 등과 사건의 중심 세력이나 성격이 전혀 달랐다.

을묘왜변 이후 조선은 대마도주와의 통교를 더욱 제한하였다. 그러자 1555년 10월 대마도주 종의조(宗義調)는 약탈을 자행한 왜구의 목을 잘라 바치며 세견선의 증가를 요청해 왔다. 1556년(명종 11) 10월 일본국왕사 천부(天富)와 현소(玄蘇)가 와서 대마도주의 세견선을 줄인 것과 삼포를 부산포로 합하여 통신과 선박 운행을 불편하게 한 것 등 10개 조항의 불만을 토로하면서 약조의 개정을 요구하였다.

1557년(명종 12)에는 대마도의 세견1선사선 평강차(平康次)가 도항하여 제포 항로의 개방과 특송선의 접대, 세견선의 증선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은 같은 해 4월 대마도주의 세견선 5척을 늘려 원래의 30척으로 하는 정사약조를 체결하였다.

의의

을묘왜변은 구주의 오도를 본거지로 활동하던 명나라 사람 오봉과 구주 서북부 지역의 왜인이 일으킨 변란이었다는 점에서 종래의 왜변·왜란 등과 성격이 전혀 달랐다. 조선에서는 을묘왜변을 계기로 지방군의 편제를 진관(鎭管) 체제에서 제승방략(制勝方略)으로 전환하고, 축성과 병기의 보강에 힘쓰는 등 대일 경계를 강화하였고, 중앙에서는 군국기무를 관장하는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이후 명종 말기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조일 간의 외교 관계는 교역과 왜구가 동시에 진행되는 비정상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 『왜구토벌사』, 국방군사연구소, 1993.
  • 이현종, 『조선전기 대일교섭사연구』, 한국연구원, 1964.
  • 하우봉, 『강좌 한일관계사』, 현음사, 1994.
  • 김병하, 「을묘왜변고」, 『탐라문화』 8, 1989.
  • 윤성익, 「‘후기왜구’로서의 을묘왜변」, 『한일관계사연구』 24, 2006.
  • 정영석, 「조선전기 호남의 왜변에 대하여-을묘왜변을 중심으로-」, 『전통문화연구』 3, 1994
  • 한문종, 「조선전기 대일 외교정책 연구-대마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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