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묘왜변(乙卯倭變)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1555년(명종 10) 왜구가 전라도 남부 지역에 침입하여 노략질한 사건.

개설

1544년(중종 39)에 발생한 사량진왜변 이후 명종 말년까지 30여 차례 왜구의 침입이 있었으며, 그중 가장 규모가 컸던 사건이 전라남도 영암·강진·진도 일대와 제주도를 침입한 을묘왜변(乙卯倭變)이었다.

역사적 배경

조선 정부는 삼포왜란과 사량진왜변 등 변란이 있을 때마다 왜인들의 세견선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이에 왜인들이 교역 규모가 줄어들고 생활필수품이 부족해지자 통교의 확대를 요청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응하지 않았다. 1544년(중종 39)에 일어난 사량진왜변을 계기로 조선은 대마도인의 통교를 금지하였다. 그 후 대마도주의 사죄와 통교 재개 요청을 받아들여 1547년(명종 2) 정미약조를 맺고 다시 통교를 허용하였는데, 이전보다도 대마도의 통교에 대한 규정이 더욱 강화되었다.

당시 일본은 호족들이 세력 다툼을 하던 전국시대로, 국내 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워 실정막부(室町幕府, [무로마치 바쿠후])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일본 서부 지방에 사는 연해민들이 조선과 명나라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아 국제 관계가 순탄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 관계가 원활하지 못한 데다, 혼란한 일본의 국내 정세 속에서 왜구가 조선의 연안을 대규모로 침입하여 약탈한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발단

조선 정부의 통제에 불만을 품은 왜구는 1555년 5월 11일 명나라 해안에서 노략질을 하고 돌아가다가 조선의 해안에 침입하였다. 이들은 70여 척의 병선으로 전라남도 영암의 이진포에서 달량포까지 동서로 나누어 상륙하여 인가를 불태우고 약탈하는 한편 달량성을 포위·공격하였다.

경과

왜선 70여 척이 침입하였다는 보고를 접한 전라병사원적(元積)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하여 장흥부사한온(韓蘊), 영암군수이덕견(李德堅)과 함께 군사 200여 명을 거느리고 달량성으로 출동하였다. 조선군이 출동하자 왜구는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가 병력을 늘려 다시 달량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해남현감변협(邊協)은 달량포의 사정을 조정에 보고하고 전 무장현감이남(李楠)과 함께 300여 명을 이끌고 달량성으로 출동하여 왜구와 싸웠으나 패하고, 이남은 전사하였다. 5월 13일 왜구가 달량성을 6겹으로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하자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전라병사원적이 화친의 뜻을 담은 글을 왜구의 진영에 보냈으나 왜구는 총공세를 취하여 결국 달량성은 함락되고, 원적과 한온도 전사하였다.

달량성을 점령한 왜구는 이 일대를 약탈한 뒤 어란포(於蘭浦)로 진출하였다. 이에 전라우수군절도사김빈(金贇)과 진도군수최린(崔潾)이 저지하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그 후 왜구는 곧바로 진도의 남도보(男桃堡)와 금갑보(金甲堡)로 진출하였다. 5월 15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조선 정부는 전라도순찰사이준경(李浚慶)을 중심으로 한 토벌군을 편성하였다. 이준경은 전라도의 군비를 점검하고 군진만으로는 왜구를 토벌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사족(士族)과 무예에 재능이 있는 자들을 뽑아 토벌군을 증강하였다.

5월 21일 왜구 50여 명이 전라도 병영을 공격하여 병기와 잡물, 증미(蒸米) 70여 석을 약탈하였고, 5월 22일 장흥부를 습격하여 잡물을 약탈하였다. 5월 24일 왜구는 영암향교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다시 영암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튿날인 25일 왜구는 다시 총공격을 개시하였지만 조선군과 영암군민이 일치단결하여 항거하므로 향교로 퇴각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영암향교를 공격하여 100여 명의 왜구를 사살하였다.

왜구가 퇴각하자 전라도좌방어사남치근(南致勤)과 전라병사조안국(趙安國)이 왜구를 추격하여 전략상 요충지인 곡천(鵠川) 밖으로 쫓아내고 그곳에 진을 설치하였으나, 왜구가 영암성을 다시 공격할 것을 우려하여 철군함으로써 전투는 끝이 났다. 이로써 5월 11일부터 시작된 영암 일대에서의 싸움은 15일 만에 평정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왜구는 가리포·회령포·녹도·근당도에 침입하였다.

6월 27일에는 왜구 1,000여 명이 제주도에 침입한 제2차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이때 제주목사김수문(金秀文)은 효용군(曉勇軍) 70명을 뽑아 적진으로 진격하여 30보의 거리를 두고 대치하다가 김직손(金直孫)·김성조(金成祖)·이희준(李希俊)·문시봉(文時鳳) 등 4명이 말을 타고 돌격하여 왜구를 패퇴시켰고, 정병 김몽근(金夢根)은 적장을 사살하였다. 조선군은 퇴각하는 왜구를 추격하여 많은 왜구를 참획함으로써 2달 동안 계속된 을묘왜변은 끝이 났다.

을묘왜변을 일으킨 집단은 일본 구주의 오도(五島)를 본거지로 활동하던 명나라 사람 오봉(五峯: 王直의 호)과 일본 구주 서북부 지역의 왜인이 중심이 되었는데, 이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후기 왜구’와 같은 유형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을묘왜변은 종래에 보았던 왜구나 왜변, 왜란 등과 사건의 중심 세력이나 성격이 전혀 달랐다.

을묘왜변 이후 조선은 대마도주와의 통교를 더욱 제한하였다. 그러자 1555년 10월 대마도주 종의조(宗義調)는 약탈을 자행한 왜구의 목을 잘라 바치며 세견선의 증가를 요청해 왔다. 1556년(명종 11) 10월 일본국왕사 천부(天富)와 현소(玄蘇)가 와서 대마도주의 세견선을 줄인 것과 삼포를 부산포로 합하여 통신과 선박 운행을 불편하게 한 것 등 10개 조항의 불만을 토로하면서 약조의 개정을 요구하였다.

1557년(명종 12)에는 대마도의 세견1선사선 평강차(平康次)가 도항하여 제포 항로의 개방과 특송선의 접대, 세견선의 증선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은 같은 해 4월 대마도주의 세견선 5척을 늘려 원래의 30척으로 하는 정사약조를 체결하였다.

의의

을묘왜변은 구주의 오도를 본거지로 활동하던 명나라 사람 오봉과 구주 서북부 지역의 왜인이 일으킨 변란이었다는 점에서 종래의 왜변·왜란 등과 성격이 전혀 달랐다. 조선에서는 을묘왜변을 계기로 지방군의 편제를 진관(鎭管) 체제에서 제승방략(制勝方略)으로 전환하고, 축성과 병기의 보강에 힘쓰는 등 대일 경계를 강화하였고, 중앙에서는 군국기무를 관장하는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이후 명종 말기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조일 간의 외교 관계는 교역과 왜구가 동시에 진행되는 비정상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 『왜구토벌사』, 국방군사연구소, 1993.
  • 이현종, 『조선전기 대일교섭사연구』, 한국연구원, 1964.
  • 하우봉, 『강좌 한일관계사』, 현음사, 1994.
  • 김병하, 「을묘왜변고」, 『탐라문화』 8, 1989.
  • 윤성익, 「‘후기왜구’로서의 을묘왜변」, 『한일관계사연구』 24, 2006.
  • 정영석, 「조선전기 호남의 왜변에 대하여-을묘왜변을 중심으로-」, 『전통문화연구』 3, 1994
  • 한문종, 「조선전기 대일 외교정책 연구-대마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