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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총론'''==
  
[?~? = ?]. 조선 전기 세조(世祖)~성종(成宗)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과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 등을 지냈다. 자는 백인(伯仁)이고, 호는 지봉(芝峯)이다. 본관은 비안(比安)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박전(朴瑔)이고, 어머니 영덕 정씨(盈德鄭氏)는 정득화(鄭得和)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박서생(朴瑞生)]]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중랑장(中郞將)[[박점(朴漸)]]이다. 부인 김씨(金氏)는 이조 낭관(郎官)김인(金堙)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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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선 전기 세조(世祖)~성종(成宗)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과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 등을 지냈다. 자는 백인(伯仁)이고, 호는 지봉(芝峯)이다. 본관은 비안(比安)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박전(朴瑔)이고, 어머니 영덕 정씨(盈德鄭氏)는 정득화(鄭得和)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박서생(朴瑞生)]]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중랑장(中郞將)[[박점(朴漸)]]이다. 부인 김씨(金氏)는 이조 낭관(郎官)김인(金堙)의 딸이다.
  
 
=='''세조~예종 시대 활동'''==
 
=='''세조~예종 시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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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1년(성종 2) 12월 『세조실록』을 편찬하는데 기여한 공으로 1품계 가자되었다.[『성종실록(成宗實錄)』성종 2년 12월 18일] 1475년(성종 6) [[종친부(宗親府)]][[전첨(典籤)]]으로 음률(音律)에 밝아 [[장악원(掌樂院)]] 겸관이 되었다.[『성종실록』세조 6년 10월 26일] 1476년(성종 7) 3월 중직대부(中直大夫)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성종실록』성종 7년 3월 13일] 이 때 [[경연관(經筵官)]]을 겸하였다. 성종이 일찍이 현명(賢明)한 임금과, 앞서는 현명했다가 뒤에 암군(暗君)이 된 임금과, 현비(賢妃)의 사적을 3개의 병풍에 그려서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제목(題目)을 나누어 시(詩)를 짓게 하였다. 그리고 박효원(朴孝元)을 비롯하여 홍문관 [[응교(應敎)]]유순(柳洵), [[진사(進士)]]성담수(成聃壽)에게 명하여 사적과 시를 그 위에 쓰도록 했다. 1476년(성종 7) 10월 이것이 완성되어, 「명군병(明君屛)」, 「선명후암군병(先明後暗君屛)」, 「현비병(賢妃屛)」을 바쳤다. 여기에 그의 「주선왕강후도(周宣王姜后圖)」·「한원제 풍소의도(漢元帝馮昭儀圖)」·「송인종광헌조황후도(宋仁宗光獻曹皇后圖)」의 시 3수가 전한다. 이 때 그는 그 공을 인정받아 [[어의(御衣)]] 1벌을 하사받았다.[『성종실록』성종 7년 10월 2l일]
 
1471년(성종 2) 12월 『세조실록』을 편찬하는데 기여한 공으로 1품계 가자되었다.[『성종실록(成宗實錄)』성종 2년 12월 18일] 1475년(성종 6) [[종친부(宗親府)]][[전첨(典籤)]]으로 음률(音律)에 밝아 [[장악원(掌樂院)]] 겸관이 되었다.[『성종실록』세조 6년 10월 26일] 1476년(성종 7) 3월 중직대부(中直大夫)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성종실록』성종 7년 3월 13일] 이 때 [[경연관(經筵官)]]을 겸하였다. 성종이 일찍이 현명(賢明)한 임금과, 앞서는 현명했다가 뒤에 암군(暗君)이 된 임금과, 현비(賢妃)의 사적을 3개의 병풍에 그려서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제목(題目)을 나누어 시(詩)를 짓게 하였다. 그리고 박효원(朴孝元)을 비롯하여 홍문관 [[응교(應敎)]]유순(柳洵), [[진사(進士)]]성담수(成聃壽)에게 명하여 사적과 시를 그 위에 쓰도록 했다. 1476년(성종 7) 10월 이것이 완성되어, 「명군병(明君屛)」, 「선명후암군병(先明後暗君屛)」, 「현비병(賢妃屛)」을 바쳤다. 여기에 그의 「주선왕강후도(周宣王姜后圖)」·「한원제 풍소의도(漢元帝馮昭儀圖)」·「송인종광헌조황후도(宋仁宗光獻曹皇后圖)」의 시 3수가 전한다. 이 때 그는 그 공을 인정받아 [[어의(御衣)]] 1벌을 하사받았다.[『성종실록』성종 7년 10월 2l일]
  
그 해 11월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장령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477년(성종 8) 5월 통훈대부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성종실록』성종 7년 11월 2일, 성종 8년 5월 21일] 그리고 6월에는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후 평안도 순찰사(平安道巡察使)허종(許琮)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파견되었다.[『성종실록』성종 8년 6월 2일] 1478년(성종 9) 5월 그는 사간원 사간으로서 임사홍(任士洪)과 함께 승정원 도승지(都承旨)현석규(玄碩圭)를 배척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함경도 부령(富寧)으로 유배되었다.[『성종실록』성종 9년 5월 6일, 성종 9년 5월 8일] 1486년(성종 17) 3월 임사홍 및 김언신(金彦辛)과 함께 직첩(職牒)이 환급되었다.[『성종실록』성종 17년 3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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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11월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장령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477년(성종 8) 5월 통훈대부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성종실록』성종 7년 11월 2일, 성종 8년 5월 21일] 그리고 6월에는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후 평안도 순찰사(平安道巡察使)허종(許琮)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파견되었다.[『성종실록』성종 8년 6월 2일] 1478년(성종 9) 5월 그는 사간원 사간으로서 임사홍(任士洪)과 함께 승정원 도승지(都承旨)현석규(玄碩圭)를 배척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함경도 부령(富寧)으로 유배되었다.[『성종실록』성종 9년 5월 6일, 성종 9년 5월 8일] 1486년(성종 17) 3월 임사홍 및 김언신(金彦辛)과 함께 직첩(職牒)이 환급되었다.[『성종실록』성종 17년 3월 6일]
  
 
그는 음률에 능하였고 글씨를 잘 썼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의 시 3수가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전한다.[『성종실록』성종 7년 10월 2l일]
 
그는 음률에 능하였고 글씨를 잘 썼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의 시 3수가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전한다.[『성종실록』성종 7년 10월 2l일]

2018년 1월 9일 (화) 22:46 기준 최신판




총론

[?~? = ?]. 조선 전기 세조(世祖)~성종(成宗)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 등을 지냈다. 자는 백인(伯仁)이고, 호는 지봉(芝峯)이다. 본관은 비안(比安)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박전(朴瑔)이고, 어머니 영덕 정씨(盈德鄭氏)는 정득화(鄭得和)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박서생(朴瑞生)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중랑장(中郞將)박점(朴漸)이다. 부인 김씨(金氏)는 이조 낭관(郎官)김인(金堙)의 딸이다.

세조~예종 시대 활동

1465년(세조 11)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남학훈도(南學訓導)가 되었다가 1467년(세조 13)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를 역임하였다.[『세조실록(世祖實錄)』세조 13년 7월 16일]

1468년(예종 즉위년) 9월에는 이조 판서(判書)성임(成任), 상호군(上護軍)정난종(鄭蘭宗), 중[僧] 문경(文冏) 등과 함께 금니(金泥 : 금박을 가루로 만들어 아교에 개어 만든 안료)로 경전을 필사하는 일에 참여하였다.[『예종실록(睿宗實錄)』예종 즉위년 9월 19일] 그 공을 인정받아 그 해에 사헌부 감찰(監察)로서 1품계 가자되었다.[『예종실록』예종 즉위년 12월 13일] 1469년(예종 1) 6월에는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있다가, 이조 좌랑(佐郞)을 거쳐 천문학관(天文學官)이 되었다.[『예종실록』예종 1년 9월 22일] 그는 그 해 예문관(藝文館)수찬(修撰)지제교(知製敎) 겸 경연청(經筵廳) 검토관(經筵檢討官)으로서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이 되어 『세조실록(世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성종 시대 활동

1471년(성종 2) 12월 『세조실록』을 편찬하는데 기여한 공으로 1품계 가자되었다.[『성종실록(成宗實錄)』성종 2년 12월 18일] 1475년(성종 6) 종친부(宗親府)전첨(典籤)으로 음률(音律)에 밝아 장악원(掌樂院) 겸관이 되었다.[『성종실록』세조 6년 10월 26일] 1476년(성종 7) 3월 중직대부(中直大夫)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성종실록』성종 7년 3월 13일] 이 때 경연관(經筵官)을 겸하였다. 성종이 일찍이 현명(賢明)한 임금과, 앞서는 현명했다가 뒤에 암군(暗君)이 된 임금과, 현비(賢妃)의 사적을 3개의 병풍에 그려서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제목(題目)을 나누어 시(詩)를 짓게 하였다. 그리고 박효원(朴孝元)을 비롯하여 홍문관 응교(應敎)유순(柳洵), 진사(進士)성담수(成聃壽)에게 명하여 사적과 시를 그 위에 쓰도록 했다. 1476년(성종 7) 10월 이것이 완성되어, 「명군병(明君屛)」, 「선명후암군병(先明後暗君屛)」, 「현비병(賢妃屛)」을 바쳤다. 여기에 그의 「주선왕강후도(周宣王姜后圖)」·「한원제 풍소의도(漢元帝馮昭儀圖)」·「송인종광헌조황후도(宋仁宗光獻曹皇后圖)」의 시 3수가 전한다. 이 때 그는 그 공을 인정받아 어의(御衣) 1벌을 하사받았다.[『성종실록』성종 7년 10월 2l일]

그 해 11월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장령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477년(성종 8) 5월 통훈대부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성종실록』성종 7년 11월 2일, 성종 8년 5월 21일] 그리고 6월에는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후 평안도 순찰사(平安道巡察使)허종(許琮)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파견되었다.[『성종실록』성종 8년 6월 2일] 1478년(성종 9) 5월 그는 사간원 사간으로서 임사홍(任士洪)과 함께 승정원 도승지(都承旨)현석규(玄碩圭)를 배척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함경도 부령(富寧)으로 유배되었다.[『성종실록』성종 9년 5월 6일, 성종 9년 5월 8일] 1486년(성종 17) 3월 임사홍 및 김언신(金彦辛)과 함께 직첩(職牒)이 환급되었다.[『성종실록』성종 17년 3월 6일]

그는 음률에 능하였고 글씨를 잘 썼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의 시 3수가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전한다.[『성종실록』성종 7년 10월 2l일]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해동야언(海東野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