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임(成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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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21년(세종3)∼1484년(성종15) = 64세]. 조선 초기 세종~성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중경(重卿), 호는 일재(逸齋) · 안재(安齋)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한성부 판사성염조(成念祖)이고, 어머니 순흥안씨(順興安氏)는 해주목사(海州牧使)안종약(安從約)의 딸이다. 중추부 동지사성엄(成揜)의 손자이고, 수찬(修撰)성간(成侃)과 예조 판서성현(成俔)의 형이다.

세종∼세조 시대 활동

1438년(세종2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447년(세종29)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승정원의 주서(注書)에 임명되었다. 이어 병조 좌랑을 거쳐, 집현전 부교리(副校理)로 옮겼다가, 이조 정랑으로 승진하였으며 예문관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성임(成任) 등을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하였다. 1456년(세조2) 사재감(司宰監)판사(判事)에 임명되어,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였다. 이때 세조가 신숙주 등에게 명하여, 세종 때 계획하여 완성하지 못한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계속 찬술(撰述)하게 하였는데, 성임은 강희맹(姜希孟) 등과 함께 춘추관 기주관(記注官)으로서 이에 참여하여 1458년(세조4) 이를 완성하였다. 1457년(세조3)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군기감(軍器監) 판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를 거쳐 공조 참의로 옮겼다. 1459년(세조5)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우부승지 · 우승지를 거쳐, 이듬해 도승지로 영전하였다. 1459년(세조5) 악학도감(樂學都監)제조(提調)가 되어 음률의 정비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1461년(세조7) 종2품상 가정대부(嘉靖大夫)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공조 참판으로 옮겼다가, 중추원 부사(副使)를 거쳐, 경상도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로 나갔다. 1464년(세조10) 형조 참판에 임명되고, 중추원 동지사를 거쳐, 이듬해 인순부(仁順府) 윤(尹)이 되었다. 1466년(세조12) 호조 참판에 임명되고,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여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陞品)하였다. 1466년(세조12) 『대전(大典)』을 상정(詳定)하는 데에 성임이 가장 많은 노력을 하였다고 하여, 형조 판서에 특별히 임명하였다. 이때 세조가 책명을 『경국대전(經國大典)』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성종 때 이것을 완성하였다. 1467년(세조13) 중추부 지사에 임명되어, 의금부(義禁府) 지사를 겸임하였다. 그때 이조 판서의 자리가 비었으나, 조정에서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하여 걱정을 하자, 세조가 말하기를, “나에게 한 사람의 청렴하고 정직한 신하가 있으니, 경들은 걱정하지 말라.” 하고, 곧바로 성임을 이조 판서로 임명하고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陞品)하였다.

예종∼성종 시대 활동

1468년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하자, 이조 판서성임을 산릉도감(山陵都監) 제조(提調)로 임명하였다. 1469년(예종1) 중추부 동지사로 옮겼는데, 기일을 한정하여 형조의 옥수(獄囚)를 빨리 판결하도록 하였다. 1470년 성종이 즉위하자, 성임은 예종 때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와 관련된 글을 올려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뇌물을 받고 수령을 제수한 일이 없다고 변명하였다. 이듬해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공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1472년(성종3) 사신이 되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명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명나라 헌종(憲宗)의 황태자(皇太子: 효종)를 책봉(冊封하는 것을 하례하였는데, 막내 동생 예문관 수찬(修撰)성현(成俔)이 질정관(質正官)으로서 따라가게 되자 집안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여겼다. 북경에 갔을 때 그가 시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으므로, 중국 관리들이 탄복하고 그의 글을 얻고자 원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1476년(성종7)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로 나갔는데, 오래되지 않아 풍비증(風痺症)을 앓아서 교체되었다. 1478년(성종9) 중추부 첨지사에 임명되었고, 1482년(성종13)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되었으나, 성임이 전(箋)을 올려 사직하였다. 1484년(성종15) 8월 오랜 병으로 죽으니, 향년이 64세였다.

그의 문집으로 『안재집(安齋集)』이 남아 있다. 그의 문장은 웅장하고 꾸미지를 않았는데, 당대에 나라에서 쓰이던 중요한 글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일찍이 옥당(玉堂)에서 방대한 『태평광기(太平廣記)』 5백 권을 초록(抄錄)하여 간략하게 『태평통재(太平通載)』 80권을 만들었는데, 중국의 『태평상절(太平詳節)』보다 훨씬 체계적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는 송설체(松雪體)의 대가로서 특히 행서(行書)를 잘 썼는데, 글씨로는 「원각사비(圓覺寺碑)」 · 「한계미 묘비(韓繼美墓碑)」 · 「최항 신도비(崔恒神道碑)」 등이 있고, 경복궁 전문(殿門)의 편액을 많이 썼다.

성품과 일화

성임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람됨이 너그럽고 온화하며 단아하고 무게가 있어서 사람을 용납하는 도량이 있었다. 그는 글씨를 잘 쓰고 문장을 잘 지어서 명성이 있었다. 그의 문장은 화려하고 풍성하였는데, 율시(律詩)와 표문(表文)에 더욱 뛰어났다. 글씨의 필법(筆法)은 힘차고 준수하였는데, 한번은 세조가 소장하고 있던 조맹부(趙孟頫)의 글씨를 내놓고 그에게 한번 써보라고 명하였다. 그 글씨가 진본과 너무나 흡사하였으므로 세조가 칭찬하였는데, 당시 궁궐의 문액(門額)이나 사찰의 비문 등은 모두 그의 필적이었다. 성종은 늦게서야 그가 시를 잘 짓는 줄 알게 되었으나 이미 그가 병중에 있었으므로, 젊을 때에 써놓은 글을 가져오게 하여 읽어보고 감탄하기를, “참으로 천재다.”라고 하였다.

한편, 성임의 글씨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1567년(명종22)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 유학자 허국(許國)이 접반사(接伴使)유심(兪深)에게 이르기를, “이곳에 있는 액자들은 모두 보잘 것이 없습니다. 숭례문(崇禮門)의 액자가 조금 쓸 만하나 이것도 역시 아주 좋은 글씨는 못 됩니다. 오직 홍화문(弘化門)대성전(大成殿)의 액자가 가장 좋은 글씨인데, 그 중에서도 대성전 액자가 더욱 좋습니다.” 하였다. 이 때 허국이 언급한 대성전 액자가 바로 성임의 글씨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坡州) 서면(西面) 오리곶이[烏里串] 언덕에 있으며, 막내 아우 성현의 친구 홍귀달(洪貴達)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부인 양천허씨(陽川許氏)는 허말석(許末石)의 딸로 자녀는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성세명(成世明)은 중추부 동지사를 지냈으며, 찬성강희맹의 사위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견한잡록(遣閑雜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허백정집(虛白亭集)』
  • 『동문선(東文選)』
  • 『미수기언(眉叟記言)』
  • 『사가집(四佳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소문쇄록(謏聞瑣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용재총화(慵齋叢話)』
  • 『임하필기(林下筆記)』
  • 『점필재집(佔畢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