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중(黃有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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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4년(명종19)∼1620년(광해군12) = 57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자는 중정(仲正), 호는 조대(釣臺)이다.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주거지는 경상도 풍기(豊基)이다. 아버지는 대사헌황섬(黃暹)이고,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풍성군(豐城君)이전(李銓)의 딸이다. 돈녕부 동지사황응규(黃應奎)의 손자이고, 승지이시(李是)의 조카이며, 영의정유영경(柳永慶)의 처조카이다.

선조 시대 활동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정시(庭試) 문과에도 급제하였으나, 당시 고시관(考試官)이던 아버지 황섬이 아들의 글씨를 알아보고 급제를 취소하였다. 상피법(相避法)에 의해 아버지가 고시관이면, 아들은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고, 음보(蔭補)로 출사하여 교관(敎官)에 임명되었다가,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1520년(중종15) 예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그때 그가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 6조의 낭관(郎官)에 임명된 것에 대해, 사헌부에서는 그의 조상이 장사를 했을 정도로 그가 미천하기에 6조에 들어갈 수 없다고 반대하였으므로 좌랑에서 체직되었다. 1605년(선조38) 42세로 사마시에 3등으로 급제하였고, 1606년(선조39) 43세로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을과 급제하였다. 승문원 박사, 성균관 전적, 병조 좌랑, 형조 좌랑을 역임하고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갔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9년(광해군1)에 고산찰방(高山察訪)이 되었다가, 그만 둔지 얼마 안되어, 그가 임기응변과 인망을 인정받아 금교찰방(金郊察訪)에 임명되었다. 1610년(광해군2)에 명(明)나라에서 온 사신 염등(冉登)이 지나가는 고을마다 소란을 일으켰는데, 그가 금교역에 부임하여 다급한 중에도 접대를 잘 하자 별탈이 없었다. 한편, 선조는 승하하기 전에 광해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세자로 세우려고 하였다. 그래서 영의정유영경 · 남이공(南以恭) 등 소북파는 선조의 유명을 받들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였으나, 정인홍(鄭仁弘) ·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는 광해군이 즉위하도록 도왔다. 결국 유영경은 대북파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하였고, 황유중의 아버지 황섬은 유영경의 처남이었기에 파직되었다. 황유중은 벼슬을 버리고 아버지를 따라 고향 풍기로 돌아와 은거하다가 1616년(광해군8) 부친상을 당해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620년(광해군12) 8월 15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57세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상도 순흥(順興) 서쪽 봉황산(鳳凰山)거묵동(去墨洞)의 선영에 있는데, 임상원(任相元)이 지은 묘지명이 남아 있다.(『염헌집(恬軒集)』권33) 부인 고령신씨(高靈申氏)는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신진(申津)의 딸로 자녀는 3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황입진(黃立震) · 황입경(黃立敬) · 황입원(黃立遠)이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은봉전서(隱峯全書)』
  • 『강재집(剛齋集)』
  • 『희암유고(希菴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