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도(黃山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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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경상도 양산의 황산역을 중심으로 설치한 역도.

개설

황산도(黃山道)는 조선시대의 41역도(驛道) 가운데 하나로, 양산(梁山)을 중심으로 경주에서 동래(東萊) 방면으로 이어지는 역로를 관할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황산도에는 중심 역인 황산역을 비롯해 총 12개 역이 소속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황산도는 성현도(省峴道)·안기도(安奇道)·송라도(松羅道)·장수도(長水道)·창락도(昌樂道) 등과 더불어 경상좌도에 속한 역도로, 양산-밀양-기장-언양으로, 경주-울산-동래로 이어지는 역로를 관장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역승(驛丞)이 주재하였으나, 이후 찰방(察訪)이 파견되어 역무를 맡아보았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황산도에는 황산역을 비롯해 잉보역(仍甫驛)·노곡역(奴谷驛)·윤산역(輪山驛)·위천역(渭川驛)·덕천역(德泉驛)·굴화역(屈化驛)·아월역(阿月驛)·소산역(蘇山驛)·휴산역(休山驛)·신명역(新明驛)·간곡역(肝谷驛) 등 12개 역이 소속되어 있었다. 황산도의 관할 역로는 소로(小路)였으며, 속역은 모두 소역(小驛)에 속하였다.

변천

황산도는 고려시대의 22역도 가운데 김주도(金州道)에 속한 양주(梁州)의 황산역·위천역, 동래의 소산역, 기장의 아등량역(阿等良驛), 울주(蔚州)의 굴화역, 언양의 덕천역 등을 계승해 성립하였다. 한때 성현도에 통합되었으나, 성현도의 속역이 너무 많아 관리하기가 어려워지자 1423년(세종 5)에 다시 분리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황산도에는 황산역·잉보역·노곡역·구어역(仇於驛)·부평역(富平驛)·굴화역·간곡역·윤산역·위천역·덕천역·아월역·성선역(省山驛)·기장신역(機長新驛)·동래신역(東萊新驛) 등 14개 역이 속하였다.

그 뒤 세조 연간인 1457년(세조 3)에는 각 역의 관할을 정비하면서, 성현도와 황산도를 통합하여 황산도라 하고 정역찰방(程驛察訪)을 두었다. 1460년(세조 6)에는 황산도에 속한 10개 역과 성현도에 속한 15개 역을 황산도로 통합하고 찰방을 파견하였다. 이어 1462년(세조 8)에는 황산역·윤산역·위천역·소산역·휴산역·신명역·아월역·간곡역·굴화역·부평역·덕천역 등 11개 역을 황산도로 편성하고 역승(驛丞)을 두었다. 이후 조선시대의 역참 제도가 확립된 『경국대전』 체제에서는 황산역·잉보역·노곡역·윤산역·위천역·소산역·휴산역·신명역·아월역·간곡역·굴화역·부평역·덕천역 등 13개 역을 관할하였다.

조선시대 후기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따르면, 황산도에는 유산역·위천역·덕천역·잉보역·노곡역·굴화역·간곡역·아월역·신명역·소산역·휴산역·수안역(水安驛)·용가역(龍駕驛)·덕산역(德山驛)·무흘역(無屹驛)·금동역(金洞驛) 등 16개의 속역이 있었다. 한편 1876년(고종 10)에는 황산도에 화포를 주로 다룬 특수 병종인 별파진(別破陣) 16명을 배치하기도 하였다. 황산도는 이후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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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만기요람(萬機要覽)』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조선전기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오일순, 「고려시대 역제의 변동과 잡색역」,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 정요근, 「고려전기 역제의 정비와 22역도」, 『한국사론』45, 2001.
  • 정요근,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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