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락도(昌樂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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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경상도 풍기의 창락역을 중심으로 설치한 역도.

개설

창락도(昌樂道)는 조선시대의 41역도(驛道) 가운데 하나로, 경상좌도의 풍기(豐基)에서 안동(安東)으로 이어지는 역로를 관할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창락도에는 창락역을 비롯해 평은역(平恩驛)·창보역(昌保驛)·옹천역(甕泉驛)·유동역(幽洞驛)·통명역(通明驛)·안교역(安郊驛)·도심역(道深驛)·죽동역(竹洞驛)·선안역(宣安驛) 등 10개 역이 소속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창락도는 황산도(黃山道)·성현도(省峴道)·안기도(安奇道)·송라도(松羅道)·장수도(長水道) 등과 더불어 경상좌도에 속한 역도로, 풍기-영주(榮州)-예안(禮安)-예천(禮川)-안동으로 연결되는 역로를 관할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역승(驛丞)이 소재하였으나, 이후 찰방(察訪)이 파견되어 역무를 맡아보았다. 창락도는 소로(小路)에 해당하였으며, 창락도의 속역은 모두 소역(小驛)에 속하였다.

변천

창락도는 고려시대의 22역도 가운데 상주도(尙州道)에 소속된 통명역·옹천역·안교역 등을 계승해 성립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창락도에는 창보역·평은역·유동역·안교역·통명역·도심역·순흥신역(淳興新驛) 등 7개 역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 뒤 세조 연간인 1457년(세조 3)에 이조의 건의에 따라 각 역의 관할을 조정할 때 안기도에 통합되면서 잠시 폐지되었다(『세조실록』 3년 9월 12일).

이후 1462년(세조 8)에 각 도의 역참을 혁파하고 역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복설되어, 창락역·죽동역·창보역·평은역·도심역·선암역·안교역·유동역·안기역(安奇驛)·웅천역·운산역(雲山驛)·송제역(松蹄驛)·금소역(琴召驛)·통명역·철파역(鐵破驛)·청로역(靑路驛) 등 16개 역을 관할하였다. 1471년(성종 2)에는 안기도에 속했던 웅천역과 선안역이 창락도로 이속되기도 하였으나, 조선시대 전기의 역참 제도가 확립된 『경국대전』 체제에서는 창락역·평은역·창보역 등 10개 역으로 편성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따르면, 창락도는 창보역·평은역·옹천역·유동역·안교역·선안역·통명역·죽동역·도심역 등 9개 속역을 관할하였다. 이후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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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만기요람(萬機要覽)』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조선전기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오일순, 「고려시대 역제의 변동과 잡색역」,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 정요근, 「고려전기 역제의 정비와 22역도」, 『한국사론』45, 2001.
  • 정요근, 「고려·조선초의 역로망과 역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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