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라도(松羅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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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경상도의 청하·영해·영일·흥해·영덕·장기·경주 등지에 설치된 역을 관할한 역도.

개설

송라도(松羅道)는 조선시대의 41역도(驛道) 가운데 하나로, 경상도 청하에서 동해안을 따라 경주에 이르는 역을 관할하였다. 송라도는 고려시대 경주도(慶州道)의 속역을 이어받아 성립되었다. 1460년(세조 6)에 역도를 개편하면서 안기도(安奇道)의 속역인 영양역(寧陽驛)·병곡역(柄谷驛)·주등역(酒登驛)·남역(南驛)과, 장수도(長守道)의 속역인 송라역(松羅驛)·망창역(望昌驛)·대송역(大松驛)·대봉역(大峯驛)·조역(朝驛)·육역(六驛), 황산도(黃山道)에 소속된 노곡역(奴谷驛)·구어역(仇於驛)·부평역(富平驛)·간곡역(肝谷驛) 등 14개 역을 하나의 역도로 통합함에 따라 신설되었다. 이후 역도의 재편과 속역의 이설을 거쳐 성종대의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에서는 송라역·병곡역·대송역·망창역·주등역·남역·봉산역(峯山驛)·육역(陸驛) 등 8개의 속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송라도는 고려시대에 경주도에 속했던 육질역(六叱驛)·송라역(松蘿驛)·병곡역·남역 등을 계승하여 성립되었다. 조선전기 세조 연간인 1460년에 역제(驛制)를 정비하면서 경상도에는 장수도·황산도·안기도·사근도(沙近道)·소촌도(召村道)와 더불어 송라도를 두었다. 이때 송라도는 고려시대의 송라역이 개칭된 송라역(松羅驛)과 병곡역·남역을 비롯해 육질역·영양역·주등역·망창역·대송역·대봉역·조역·육역·노곡역·구어역·부평역·간곡역 등 14개 역으로 편성되었다(『세조실록』 6년 2월 5일).

송라도의 속역에는 많은 종류의 역속이 배치되어 역무를 담당하였다. 조선후기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기록을 바탕으로 송라도 속역의 역속과 역마 현황을 정리하면 다음 <표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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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에서 보듯이, 흥해의 망창역을 제외한 나머지 7개 속역에는 역리(驛吏) 602명, 역노(驛奴) 502명, 역비(驛婢) 348명이 배속되어 역무를 맡아보았으며, 역마는 63필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여지도서』경상도 감영 역원 조에는 송라도 전체에 역노 3,713명, 역비 2,071명과, 상등마 4필, 중등마 19필, 하등마 57필 등 총 80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흥해의 망창역의 경우 『여지도서』에는 기록이 누락되어 있지만,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송라도역지(松羅道驛誌)』에 따르면 도장(都長) 1명, 병방(兵房) 1명, 이노(吏奴) 563명, 역비 185명과, 중마 1필, 복마 8필이 배치되어 있었다. 송라도에는 그밖에 포수(砲手) 15명이 배치되기도 하였다(『고종실록』 10년 5월 26일).

송라도는 청하-영덕-영해로 이어지는 길과, 청하에서 경주 방면으로 이어지는 노선 및 청하-흥해-영일-장기 등으로 이어지는 역로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송라도는 조선후기까지 동해안 지역의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변천

조선시대의 송라도는 다음 <표2>에서 볼 수 있듯이, 고려시대 경주도의 속역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이 역들은 조선전기 세조 연간에 안기도와 장수도 등에 분산되어 있었다. 1460년에 안기도·장수도·황산도의 속역 중 14개 역을 송라도로 편성하는 과정에서 송라도에 속하게 되었다. 1462년(세조 8)에는 역 사이의 거리에 따라 역로를 재정비했다. 송라도에는 송라역·남역·주등역·병곡역·영양역·망창역·대송역·화목역(和目驛)·문거역(文居驛)·청운역(靑雲驛)·봉산역(峯山驛)·육역(陸驛)·각산역(角山驛) 등 13개의 역을 소속시키고 종9품 역승(驛丞)을 파견해 관할하게 하였다. 그 뒤 1471년(성종 2)에는 병조의 건의에 따라 송라도에 속한 영양역·각산역·청운역·문거역·화목역을 안기도로 이속하였다(『성종실록』 2년 윤9월 1일). 그에 따라 송라도는 『경국대전』 체제에서는 송라역·병곡역·대송역·망창역·주등역·남역·봉산역·육역 등 8개의 속역으로 편성되었다. 이후 중종대에는 종6품 찰방이 파견되어 역무를 총괄하였다. 1471년에는 경상도관찰사의 요구에 따라, 세조대에 송라도에 속했던 영양역·각산역·청운역·문거역·화목역 등이 안기도로 이속되었다. 그에 따라 『경국대전』 체제에서는 송라역·병곡역·대송역·망창역·주등역·남역·봉산역·육역 등 8개의 속역을 관할하는 역도로 확립되었다.

이후 송라도는 조선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 『대동지지』 및 『송라도역지』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존속하다가,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철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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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영남읍지(嶺南邑誌)』
  • 『송라도역지(松羅道驛誌)』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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