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역(寧陽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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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도 지역의 역도(驛道) 중 하나인 안기도에 속한 역.

개설

영양역(寧陽驛)은 조선 세종에서 세조 연간에 신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설립 당시에는 안기도(安奇道)에 소속되었으나, 세조대에 송라도로 이속되었다가 성종대에 다시 안기도의 속역으로 환원되었다. 이후 별다른 변화 없이 존속하다가, 갑오개혁을 계기로 역참제가 철폐되면서 함께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역참은 중앙과 지방 사이에 왕명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진상품 등 공공 물자를 운송하며, 왕래하는 사신을 접대하는 등의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기 위해 설립한 육상 교통 기관이었다. 영양역 역시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조선시대 경상도 지역에 설치하였다.

조직 및 역할

조선시대에는 역역(驛役)을 원활하게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역참에 역리(驛吏)와 역노비(驛奴婢) 등을 포함한 다양한 역민(驛民)을 편성하였으며, 역의 재정에 충당하도록 역위전(驛位田) 또는 마전(馬田)을 지급하였다. 영양역의 경우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경상도 영해현(寧海縣) 조에 따르면, 역리(驛吏) 5명, 역노(驛奴) 3명, 역비(驛婢) 2명과, 중마 2필, 복마 5필 등 7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세종 연간의 역도 체제가 기록되어 있는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영해도호부에 위치한 역으로 병곡역(柄谷驛)과 석보(石保)에 있는 신역(新驛)이 기록되어 있을 뿐 영양역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영양역이 『조선왕조실록』에서 처음 언급된 것은 세조대의 일이다. 1460년(세조 6)에 안기도의 속역인 영양역과 장수도(長守道) 및 황산도(黃山道)의 일부 속역을 통합하여, 당시 신설된 송라도의 속역으로 편제했다는 기사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세조실록』 6년 2월 5일).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면, 영양역은 세종대 이후에 신설되어 안기도에 소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성종대인 1471년(성종 2)에는 송라도에 속한 각산역(角山驛)·청운역(靑雲驛)·문거역(文居驛)·화목역(和目驛) 등과 함께 안기도의 속역으로 환원되었다(『성종실록』 2년 윤9월 1일).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안기도의 속역으로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한편 『여지도서』에 따르면, 영양역은 영해부 서쪽 80리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동쪽의 병곡역과는 80리, 서쪽의 진보각산역(眞寶角山驛)과는 15리 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