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의군 이영(和義君 李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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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25년(세종 7)~1453년(단종 1) = 29세.]. 조선 전기 세종~세조 때 활동한 왕자. 세종(世宗)의 서출 10남 2녀 중에서 제 1왕자. 봉작(封爵)은 화의군(和義君)이다. 자는 양지(良之)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강영빈(姜令嬪)인데, 궁인(宮人) 출신이다.

세종 시대의 활동

1433년(세종 15) 나이 9세에 화의군으로 봉해졌다. 1436년(세종 18) 4월 나이 12세 때 종학(宗學)에 입학하였고, 그해 10월 사헌부 감찰(監察)박중손(朴仲孫)의 딸과 혼인하였다. 학문에 조예가 깊었는데,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할 때 동생 계양군(桂陽君)이증(李璔)과 함께 정음청(正音廳)에서 이를 감독하였고, 또 이 일을 하면서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등과 교분을 샇았다.[『해동잡록(海東雜錄)』 4권 「본조(本朝) 성삼문」, 『홍재전서(弘齋全書)』 22권 「화의군 이영 치제문」]

그러나 세종 시대에 각종 염문으로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 1441년(세종 23) 8월 임영대군(臨瀛大君)이구(李璆)와 화의군이영이 종[奴] 매읍금(每邑金)과 사정(司正)박지(朴枝)를 시켜, 여자 두 사람에게 남복(男服)을 입혀 어둠을 틈타 광화문(光化門)을 통하여 경복궁으로 들어오게 하였는데, 문지기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이구와 이영은 직첩과 과전(科田)을 회수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또 두 여자와 박지, 매읍금도 각각 처벌받았다. 1442년(세종 24) 다시 부정윤(副正尹)이 되었다. 1444년(세종 26) 화의령(和義令) 이영은 황량(黃良) · 강처정(姜處貞) · 우지(牛知) 등 간사한 소인배들을 궁궐 안으로 불러들여 놀다가 결국 발각되었다. 이에 황량 등은 의금부(義禁府)에 내려서 국문(鞫問)하고 모두 군역(軍役)에 충당하였고, 화의군이영은 고신(告身)을 회수 당하였다. 이해 7월 집순랑(執順郞)이 되어서, 과전을 현직의 품계에 따라 받았다. 1449년(세종 31) 6월 관원의 기생첩을 빼앗은 죄로 다시 직첩을 회수 당하였다. 또 처가의 처백부(妻伯父) 박대손(朴大孫)의 종첩을 가로채서 자식을 낳은 적도 있었다.

1450년(문종 즉위) 다시 화의군에 봉해졌다. 1455년(단종 3) 세종의 제 6왕자 평원대군(平原大君) 사후에 평원대군의 첩 초요갱(楚腰輕)과 사통한 사건이 발각되어 또다시 직첩을 몰수당하고 외방에 부처(付處)되었다. 또 금성대군(錦城大君) 집에서 화의군 등이 사연(射宴)한 사실도 추가로 발각되어, 처벌을 더 받았는데, 금성대군도 이 일로 인하여 고신을 추탈당하였다. 이는 수양대군(首陽大君) 일파가 금성대군과 화의군을 타도하려는 저의가 숨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종 복위 운동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은 한명회(韓明澮) · 권람(權擥) 등과 공모하여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서, 문종의 고명(誥命)을 받고 단종을 보필하던 의정부의 영의정황보인(皇甫仁)과 좌의정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동생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강화도에 유배시켜 죽이고, 영의정에 되어서 정권을 잡았다. 이때 종친들은 수양대군의 정변에 대하여 반대와 지지로 나뉘어졌다. 1455년(단종 3) 양혜빈(楊惠嬪)과 금성대군이 가장 수양대군 일파에 적대적이었고, 또 화의군이영도 이들을 추종하였으므로, <계유정난> 이후에 수양대군 일파가 이들을 숙청하려고 하였다.

1455년 윤6월 세조가 즉위한 후,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금성대군과 화의군은 안평대군의 잔당이라 공격하고 죄를 줄 것을 청하자, 화의군이영은 가산을 적몰당하고, 충청도 청산(靑山)에 부처되었다가, 그해 8월 다시 황해도 연안(延安)으로 이배(移配)되었다. 금성대군도 평안도 삭녕(朔寧)으로 유배되었다가 전라고 광산(光山)으로 이배되었다. 강원도 청풍(淸風)으로 유배되었던 양혜빈은 그해 11월 9일 유배지에서 교형을 당하였다. 다음해 1456년(세조 2)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일어나서, 성삼문 · 박팽년 · 이개(李塏)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었는데, 화의군도 금성대군과 함께 이에 연루되어 다시 고신을 빼앗기고 가산이 적몰되었으며, 먼 지방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금성대군은 경상도 순흥(順興)으로 화의군은 전라도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

1457년(세조 3)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순흥부사(順興府使)이보흠(李甫欽)과 단종 복위를 도모하였으나 실행되기 전 안동의 관노의 고발로 발각되어 사사(賜死)되었다. 이 일로 영월에 유배되었던 노산군(魯山君: 단종)도 교살(絞殺)되었다. 이때 화의군도 연루되어 종친록(宗親錄)에서 삭제당하였으나 목숨은 건졌다. 1482년(성종 13) 7월 세조의 정희왕후(貞熹王后)가 특별히 배려하여 지방에 원하는 곳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외방(外方) 종편(從便)하였다. 1483년(성종 14)에 어머니 임종을 당해서 서울로 돌아왔으나, 상례를 마치자, 다시 외방 종편하였다. 1484년(성종 15) 다시 서울 이외에 어느 지방에서나 거주할 수 있는 경외(京外) 종편(從便)을 허락하였다. 1518년(중종 13) 손자 이윤(李綸)의 상언으로 복작되었으면 『선원록(璿源錄)』에 그 이름이 다시 오르게 되었다.

묘소와 후손

1736년(영조 12) 충경(忠景)이란 시호를 내렸다. 묘소는 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 산 60-2번지에 있다.(서울특별시기념물 제24호) 1731년(영조 7) 영조는 단종의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6종영(六宗英)을 차례로 배향(配享)할 것을 명하였는데, 당시 6종영은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종실의 원로 여섯 분을 말한다. 6종영은 세종의 적출 왕자 안평대군이용(李瑢), 금성대군이유(李瑜)과, 세종의 서출 왕자 화의군이영, 한남군(漢南君)이어(李*), 영풍군(永豊君)이전(李瑔)과, 태조의 제 8왕자 의안대군의 손자인 중추원(中樞院)판사(判事)이양(李穰)을 말하는데, 모두 단종의 백식단(配食壇)에 종친으로서 제일 첫줄에 배향되는 영광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1791년(정조 15) 장릉 배식단(長陵配食壇)의 정단(正壇)에 배향되었다.

부인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좌찬성박중손(朴仲孫)의 딸인데, 자녀가 없다. 서출 아들 3형제가 있는데, 1자는 여흥정(驪興正)에 추증된 이원(李轅)이고, 2자는 여성수(驪城守) 이번(李轓)이고, 3자는 금난수(金蘭守)에 추증된 이식(李軾)이다. 1489년(성종 20) 5월 이영이 상서하여 자신의 서자들을 종적에 입적시켜 주기를 간청하자, 성종이 그들을 양인으로 삼아서 이를 허락하였다. 그들은 비첩(婢妾)아난(阿難)의 아들 건리동(件理同), 비첩 내은금(內隱今)의 아들 수달(修撻), 비첩 감지(甘之)의 아들 팽수(彭守) 등이다. 그 뒤에 화의군이 복직되면서 그들도 『선원록』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보감(國朝寶鑑)』
  • 『일성록(日省錄)』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홍재전서(弘齋全書)』
  • 『동문선(東文選)』
  • 『여헌집(旅軒集)』
  • 『해동역사(海東繹史)』
  • 『해동잡록(海東雜錄)』
  • 『서당사재(西堂私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