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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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35년(영조 11)~1815년(순조 15) = 81세]. 조선 21대 왕인 영조(英祖)의 아들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부인이자, 조선 22대 왕인 정조(正祖)의 어머니. 궁호는 혜경(惠慶)이고, 시호는 헌경(獻敬)이다. 본관은 풍산(豐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영의정홍봉한(洪鳳漢)이고, 어머니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낸 이집(李潗)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된 홍현보(洪鉉輔)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좌찬성에 추증된 홍중기(洪重箕)이다. 장헌세자가 폐세자가 되면서 폐세자빈이 되었으나, 장헌세자가 죽은 후에 세자빈의 신분이 회복되었다.

세자빈 간택과 장헌세자의 죽음

홍혜빈, 즉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는 선조(宣祖)의 딸인 정명공주(貞明公主)와 그의 부마인 홍주원(洪柱元)의 둘째 아들 홍만용(洪萬容)의 증손자 홍봉한의 딸로 1735년(영조 11) 6월 18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9세가 되던 1743년(영조 19) 삼간택을 통하여 왕세자빈에 간택되었고, 이듬해인 1744년(영조 20) 동갑의 왕세자와 혼인을 하여 왕세자빈이 되었다.[『영조실록(英祖實錄)』영조 19년 11월 13일, 영조 20년 1월 9일] 그로부터 7년 후인 1750년(영조 26) 혜경궁홍씨는 장헌세자와의 사이에서 첫째 아들을 낳았고, 영조는 이듬해에 이 원손을 왕세손에 책봉하였다.[『영조실록』영조 26년 8월 27일, 영조 27년 5월 13일] 그러나 왕세손은 3세가 되던 1752년(영조 28) 3월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후 의소세손(懿昭世孫)의 시호가 내려졌다.[『영조실록』영조 28년 5월 12일] 그리고 그해 가을 혜경궁홍씨는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훗날 조선의 22대 왕이 되는 정조였다.[『영조실록』영조 28년 9월 22일]

정조는 1759년(영조 35) 8세의 나이로 왕세손에 책봉되었는데, 당시 정조의 아버지인 장헌세자와 할아버지인 영조의 사이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영조실록』영조 35년 윤6월 22일] 영조는 자신의 체력이 약해져서 정양이 필요하다며 장헌세자가 15세가 되던 1749년(영조 25)부터 대리청정을 하게 하였다.[『영조실록』영조 25년 1월 27일] 사실 이것은 영조의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당시 정국 운영을 익히게 하기 위한 목적이 더욱 컸다. 특히 노론(老論)소론(少論)의 첨예한 대립 속에 왕위에 오른 영조는 탕평(蕩平)의 정치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였으므로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춰 장헌세자가 정국을 운영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대리청정을 하는 동안 정사 처리를 두고 영조와 장헌세자의 사이는 점차 멀어졌고, 아울러 장헌세자와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과의 관계 또한 틀어지면서 장헌세자의 비호 세력은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1762년(영조 38) 5월 나경언(羅景彦)이 영조에게 올린 장헌세자의 비행(非行) 10여 조는 결정타의 역할을 하였다.[『영조실록』영조 38년 5월 22일] 그로부터 한 달 후 영조는 장헌세자를 폐하였고, 혜경궁홍씨 또한 폐서인이 되어 정조와 함께 궁을 떠나 친정인 홍봉한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영조실록』영조 38년 윤5월 13일] 그리고 얼마 후 장헌세자는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영조실록』영조 38년 윤5월 21일]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혜경궁홍씨의 입장도 매우 난처하였다. 혜경궁홍씨의 친정은 노론 가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외척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를 견제하는 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1759년(영조 35) 영조의 계비(繼妃)가 된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아버지 김한구(金漢耈) 등이 이들과 결탁하였다. 이런 가운데 견제 세력들은 세자의 비행을 들추며 홍봉한 세력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홍봉한 세력도 처음에는 세자의 비행을 감쌌으나, 시간이 갈수록 세자의 비행을 감쌀 수만은 없게 되었고, 이에 세손의 지위마저도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결국 김한구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폭로한 후 장헌세자의 어머니인 영빈이씨(暎嬪李氏)는 영조를 찾아가 장헌세자가 병을 앓고 있으니, 임금을 보호하고 왕세손을 건져 종사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는 ‘대처분’이 필요하다고 하였다.[『영조실록』영조 40년 9월 26일, 『한중록(閑中錄)』] 아울러 왕세손과 왕세손의 어머니, 즉 혜경궁홍씨에 대해서는 반드시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한중록』] 그리고 얼마 후 장헌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명에 따라 죽게 되었으나, 혜경궁홍씨와 왕세손은 무사할 수 있었다. 이후 영조는 장헌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세자의 지위를 회복시켰으며, 동시에 혜경궁홍씨에게도 ‘혜빈(惠嬪)’이라는 시호를 내려 세자빈으로의 신분을 회복시켰다.[『영조실록』영조 38년 윤5월 21일]

그리고 2달여 후에 정조는 왕세자로 책봉되었다.[『영조실록』영조 38년 7월 24일, 영조 38년 8월 1일] 이 무렵 혜경궁홍씨는 영조를 만나서 자신들을 지켜준 것에 대한 감사를 하였고, 정조를 영조와 영빈이씨가 주로 거처하던 경희궁(慶熙宮)으로 데려갈 것을 부탁하였다.[『한중록』] 이는 영조의 곁에 정조를 두기 위한 것으로, 영조와 정조 사이에 유대감을 형성시켜 정조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 1764년(영조 40) 영조는 두 명의 세자가 모두 죽었으므로, 이런 경우에는 장통(長統)을 이어가는 것이 옳다며 정조를 영조의 첫째 아들인 효장세자의 후사로 입적시켰다.[『영조실록』영조 40년 2월 20일] 이로써 혜경궁홍씨는 더 이상 왕세자의 어머니가 아니라, 장헌세자의 세자빈으로서만 머물게 되었다.

정조~순조 때의 친정 가문의 쇠퇴와 복권

정조는 왕세자로 책봉된 이후에도 왕위에 오르기까지 쉽지 않았다. 특히 1775년(영조 51) 영조가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자 하였을 때, 영조와 영빈이씨의 막내딸인 화완옹주(和緩翁主)와 그의 양자인 정후겸(鄭厚謙), 그리고 혜경궁홍씨의 작은 아버지인 홍인한(洪麟漢) 등의 거센 반대를 겪어야 했다.[『영조실록』영조 51년 11월 30일] 그럼에도 영조는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켰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776년(정조 즉위년) 영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정조는 조선의 22대 왕이 되었다. 즉위와 동시에 정조는 외척 세력 제거에 착수하여, 정후겸과 홍인한을 사사(賜死)하고, 그 외에 이들과 뜻을 같이 한 사람들도 처벌하였다.[『정조실록(正祖實錄)』정조 즉위년 7월 5일] 이로써 당시 가장 큰 외척 세력이었던 홍봉한 계열은 와해되었으며, 이는 혜경궁홍씨 친정의 쇠퇴를 의미하였다. 다만 홍봉한과 화완옹주는 정조의 외할아버지와 영조의 딸이라는 점에서 처벌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정조실록』정조 즉위년 5월 10일, 정조 즉위년 5월 23일, 정조 2년 윤6월 17일] 이어 정조는 홍봉한 세력을 공격하던 견제 세력, 즉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金龜柱) 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김귀주를 흑산도로 유배하였다.[『정조실록』정조 즉위년 9월 9일] 이렇듯 혜경궁홍씨의 친정은 정조 초기에 크게 쇠퇴하였으나, 이후 외척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며 정조의 국정 운영에 참여하여 장헌세자에 대한 정조의 정책을 지지하는 시파(時派)로서 장헌세자 문제에 강경하게 대처하던 벽파(辟派)와 대립하였다.

그러다가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순조(純祖)가 왕위에 오르면서 혜경궁홍씨의 친정은 또다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1800년(순조 즉위년) 정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11세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그 수렴청정을 정순왕후가 하였는데, 정순왕후의 친정이 바로 벽파의 핵심인 경주 김씨(慶州金氏)였던 것이다. 정순왕후는 벽파와 대립하던 시파를 와해하기 위하여 1801년(순조 1) 천주교도를 처벌하는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켰다. 이는 시파의 일부가 천주교와 관련이 깊다는 것을 이용한 것이었다. 결국 시파는 핵심 세력들의 다수가 유배를 떠나게 되면서 정권에서 축출되었고, 이 과정에서 혜경궁홍씨의 동생인 홍낙임(洪樂任)도 천주교도라고 하여 사사(賜死)당하였다.[『순조실록(純祖實錄)』순조 1년 5월 29일]

이렇게 순조 초기에 혜경궁홍씨의 친정을 비롯한 시파의 다수가 숙청되자, 혜경궁홍씨는 홍낙임의 사사와 가문의 몰락이 자신으로 비롯된 정치적 탄압이라고 판단하였다. 이후 혜경궁홍씨는 가문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아들 정조와의 약속을 이유로 순조에게 가문의 복권을 요구하기 위하여 작성한 『한중록』이었다.[『한중록』] 그런 가운데 1805년(순조 5)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혜경궁홍씨는 자신의 가문을 복권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였다. 1807년(순조 7) 순조는 혜경궁홍씨를 기쁘게 한다는 이유로 홍봉한의 증손자인 홍세주(洪世周)를 군직(軍職)으로 출사시켰다.[『순조실록』순조 8년 7월 27일] 이에 대사간(大司諫)이던 이심도(李審度)가 이를 반대하며 시파와 벽파의 대립 원인으로 홍봉한을 지목하여 비난하였다.[『순조실록』순조 8년 9월 27일] 그러자 혜경궁홍씨가 식음을 멀리하는 등의 직접적인 행동을 취하였고, 그 결과 순조는 이심도를 처형하기로 결정하였다.[순조 8년 10월 5일, 순조 8년 11월 4일] 이는 정순왕후 사후 장헌세자의 문제를 다시 거론하며 강경한 입장을 보이다가 김달순(金達淳)의 사사로 위기를 맞았던 벽파가 결국 조정에서 물러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홍세주가 출사를 하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적으로 혜경궁홍씨 가문의 복권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1814년(순조 14)에는 혜경궁홍씨의 팔순을 기념하여 홍낙임 또한 복관(復官)되었다.[『순조실록』순조 8년 11월 29일, 순조 14년 6월 14일]

혜경궁홍씨의 추존

정조는 왕위에 오른 당일 자신은 장헌세자의 아들이라고 천명하고,[『정조실록』정조 즉위년 3월 10일] 이후 단계적으로 아버지 장헌세자와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추숭 작업을 진행하였다. 가장 먼저 즉위 직후 어머니 혜경궁홍씨에게는 ‘혜경궁(惠慶宮)’의 궁호를 올렸으며, 이어 자신의 아버지에게는 ‘장헌(莊獻)’이라는 존호를 올렸다.[『정조실록(正祖實錄)』정조 즉위년 3월 10일, 정조 즉위년 3월 20일] 또한 경기도 양주에 위치한 장헌세자의 묘인 수은묘(垂恩墓)는 영우원(永祐園)으로,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는 경모궁(景慕宮)으로 격상시켰다.[『정조실록』정조 즉위년 3월 20일]

이후 정조는 정순왕후가 건강을 회복한 것을 기념하여 1778년(정조 2) 2월 혜경궁홍씨에게 ‘효강(孝康)’이라는 존호를 올렸으며, 이어 3월에는 효강혜빈궁(孝康惠嬪宮) 대신 효강혜빈저하(孝康惠嬪邸下)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하였다.[『정조실록』정조 2년 2월 25일, 정조 2년 3월 15일] 그리고 1783년(정조 7) 4월에는 문효세자(文孝世子)의 탄생을 기리며 장헌세자에게는 ‘수덕돈경(綏德敦慶)’이란 존호와 혜경궁홍씨에게는 ‘자희(慈禧)’라는 존호를 각각 올렸으며, 이어 1784년(정조 8) 9월에는 영조 즉위 60년을 기념하여 장헌세자에게는 ‘홍인경지(弘仁景祉)’의 존호와 혜경궁홍씨에게는 ‘정선(貞宣)’이라는 존호를 더하였다.[『정조실록』정조 7년 4월 1일, 정조 8년 9월 17일, 정조 8년 9월 18일] 아울러 1789년(정조 13) 장헌세자의 무덤인 영우원의 이름을 ‘현부(顯父)를 융성하게 높인다.’는 의미의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꾸고, 이어 수원부 화산, 즉 현재의 경기도 화성으로 이장하였다.[『정조실록』정조 13년 10월 7일]

한편 1795년(정조 19)은 장헌세자와 혜경궁홍씨가 환갑을 맞는 해였다. 이에 정조는 1793년(정조 17)부터 그 준비를 시작하면서, 1795년에 장헌세자와 혜경궁홍씨의 존호를 올리도록 하였다.[『정조실록』정조 17년 11월 22일] 그리하여 1794년(정조 18) 12월 정조는 장헌세자에게 올릴 존호를 ‘장륜융범기명창휴(章倫隆範基命彰休)’로 결정하였는데, 8자 존호는 왕에게만 올리는 것으로 정조의 장헌세자에 대한 추숭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정조실록』정조 18년 12월 18일] 아울러 이때 혜경궁홍씨에게 올릴 존호는 ‘휘목(徽穆)’으로 결정하였고, 이듬해인 1795년 1월 장헌세자와 혜경궁홍씨의 존호를 추숭하였다.[『정조실록』정조 18년 12월 10일, 정조 19년 1월 17일] 한편 그해 윤2월 정조는 혜경궁홍씨와 함께 화성(華城)에 행차하여 봉수당(奉壽堂)에서 혜경궁홍씨의 회갑을 축하하는 연회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정조는 혜경궁홍씨에게 술 7잔을 올렸다. 이는 국왕과 왕비에게는 술을 9잔 올리는 것과 차이가 있는 것으로, 당시까지의 혜경궁홍씨 추존 단계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1800년(순조 즉위년) 정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장헌세자와 혜경궁홍씨의 추숭은 더 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어 왕위에 오른 순조는 여러 차례 행사를 개최하며 혜경궁홍씨에게 존호를 올리고자 하였으나, 혜경궁홍씨는 아들 정조의 죽음 이후 더 이상의 존호를 받지 않겠다고 거절하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순조실록(純祖實錄)』순조 9년 1월 22일, 순조 16년 1월 21일] 그런 가운데 1815년(순조 15) 혜경궁홍씨는 81세의 나이로 창덕궁(昌德宮)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순조의 왕통은 효장세자와 정조를 잇는 것이라고 하여 순조는 한 등급 낮은 상복을 입었다.[『순조실록』순조 15년 12월 16일] 이후 혜경궁홍씨의 시호는 ‘헌경(獻敬)’으로 결정되었고, 1816년(순조 16) 3월 장헌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에 합장하였다.[『순조실록』순조 15년 12월 25일, 순조 16년 1월 21일]

1855년(철종 6) 철종(哲宗)은 장헌세자와 혜경궁홍씨의 탄생 2주갑(周甲), 즉 120주년을 맞이하여 이를 기념하고자 장헌세자와 혜경궁홍씨에게 각각 ‘찬원헌성계상현희(贊元憲誠啓祥顯熙)’와 ‘유정(裕靖)’이라는 존호를 올렸다.[『철종실록(哲宗實錄)』철종 5년 11월 6일] 그리고 고종(高宗)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실 위상을 높이는 일련의 조치 가운데 하나로 1899년(고종 36) 장헌세자와 혜경궁홍씨를 장종(莊宗)과 헌경왕후(獻敬王后)로 추숭하였다.[『고종실록(高宗實錄)』 고종 36년 9월 1일] 이에 따라 장헌세자와 혜경궁홍씨의 딸인 청연군주와 청선군주(淸璿郡主)는 각각 청연공주와 청선공주로 추존되었으며, 그들의 남편인 김기성(金箕性)과 정재화(鄭在和)는 광은위(光恩尉)와 흥은위(興恩尉), 그리고 혜경궁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한과 어머니는 부원군(府院君)과 부부인(府夫人)으로 추증되었다.[『고종실록』 고종 36년 9월 21일, 『일성록(日省錄)』 고종 36년 7월 27일] 또한 이로부터 한 달여 후에 고종은 태조(太祖)와 자신의 직계 조상인 장종과 정종, 순조와 익종(翼宗)을 황제로 추존하면서, 장헌세자와 혜경궁홍씨는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와 의황후(懿皇后)로 추존하였다.[『고종실록』 고종 36년 12월 7일, 고종 36년 12월 23일]

『한중록』의 저술

10세 때 궁에 들어가서 81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72년을 궁에서 살았던 혜경궁홍씨는 시아버지로 인해 남편이 죽는 등 여러 풍파를 겪었다. 이러한 삶을 혜경궁홍씨는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한중록』이다. 총 4편으로 구성된 『한중록』은 혜경궁홍씨가 환갑이 되던 1795년 제1편을 작성하였으며, 나머지 3편은 1801년(순조 1)부터 1805년(순조 5) 사이에 작성하였다. 궁중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므로 궁중 용어와 궁중 풍속 등이 풍부하게 등장하며, 여류 문학이라는 점에서 당시 여성들의 삶과 가치관 등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정치적 사건들이 발생하던 때에 당사자로 사건에 연루되거나, 직접 사건을 목격하는 등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겪은 내용을 서술하였으므로 사실만을 나열한 관찬 사료에 비하여 이야기가 풍부한 것도 특징이다.

그 내용은 출생에서 세자빈 간택, 장헌세자의 죽음, 친정 가문의 몰락 등 혜경궁홍씨와 관련된 대부분의 내용이 적혀 있다. 특히 평온한 시기에 작성하여 담담하게 삶을 되돌아보던 1편과 달리 순조 즉위 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통하여 자신의 친정을 몰락시키던 시기에 작성한 2~4편에서는 벽파에 대한 분노가 상당히 강하게 담겨 있다. 아울러 4편에서는 장헌세자가 정신병에 걸리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영조가 그러한 결정을 내렸다고 서술하면서, 아버지 홍봉한이 뒤주를 바쳤다는 혐의 등은 부당한 것이라며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결백과 친정의 신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자신의 소망도 담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한중록』은 혜경궁홍씨가 자신의 친정을 신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성품과 일화

혜경궁홍씨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려서부터 온화하고 효심과 우애가 깊었으며, 검소하고 경우를 알았다고 한다. 또한 총명하고 박식하여 한 번 보고 들으면 절대 잊지 않았다고도 전해진다. 그리하여 궁에 들어와서도 어른들을 대하는 절차와 예의가 세련되었고, 여러 옹주들과 잘 지냈다고 한다. 또한 장헌세자를 지극히 섬기면서 도왔으므로, 장헌세자가 매우 존중하였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순조실록』순조 16년 1월 21일]

한편 혜경궁홍씨가 태어나기 전날 아버지 홍봉한은 꿈에서 흑룡을 보았으므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딸이 태어나 의아해 했다고 전해진다. 할아버지 홍현보는 이러한 손녀를 애지중지하여 “이 아이가 작은 어른이니 성인(成人)을 일찍 하리라.”고 자주 농담을 하였는데, 양반집 딸들이 일찍 시집을 간다는 말은 왕실의 며느리가 된다는 의미였다고 한다.[『한중록』] 이러한 말처럼 궁에 들어온 혜경궁홍씨는 주위 사람들에게도 덕으로써 대하여서, 효순왕후(孝純王后)의 궁인 중에 한 명이 장헌세자의 법복(法服)을 훔쳐서 훼손한 것이 발각되었을 때, 훔친 궁인이 목숨을 잃지 않도록 아무도 그 일을 누설하지 못하게 하며 일을 처리한 적도 있었다고 전해진다.[『순조실록』순조 16년 1월 21일]

묘소와 후손

혜경궁홍씨는 세상을 떠난 후 현륭원에 장헌세자와 합장되었는데, 현륭원은 1899년 11월 장헌세자와 혜경궁홍씨가 장종과 헌경왕후로 추존되면서 융릉(隆陵)이라는 능호를 받았다. 융릉에는 12지신상과 병풍석, 곡장과 여러 석물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융릉 아래에는 정자각과 홍살문, 재실 등이 있다. 1970년에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으며,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에 위치하고 있다.

후손으로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1남은 의소세손이며, 2남은 정조이다. 1녀는 청연군주로 광은부위(光恩副尉)김기성과 혼인하였으며, 2녀는 청선군주로 홍은부위(興恩副尉)정재화와 혼인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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