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흡(崔昌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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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87년(정조 11)~1839년(헌종 5) = 53세]. 조선 후기 순조(純祖)~헌종(憲宗) 때의 천주교도로, <기해박해(己亥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베드로. 거주지는 서울이다.

순조~헌종 시대 활동

‘여칠’이라고도 불린 최창흡(崔昌洽)은 서울 중인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러나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이복형인 최창현(崔昌顯)이 사망하자 천주교를 탈퇴하였다. 그러다가 29세경 손소벽(孫小碧)과 혼인을 한 후에, 1821년(순조 21) 콜레라가 전국적으로 창궐하자 아내와 함께 위급한 상황에서 신부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세례를 받는 대세를 받고는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기해일기(己亥日記)』],[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1833년(순조 33)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가 입국하자 그는 다시 성사를 받고 이전의 죄를 보속할 마음으로 순교에 뜻을 품게 되었다. 그러던 중 1839년(헌종 5) 기해박해가 발발하였고, 그는 그해 5월에 아내와 딸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 끌려가 혹독한 신문을 받은 후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서 또한 문초와 형벌을 받은 최창흡은 결국 사형선고를 받아 1839년 11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53세였다.(『헌종실록(憲宗實錄)』 5년 11월 24일),[『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헌종 5년 11월 24일]

그후 1925년 7월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어 성인 반열에 올랐다.

성품과 일화

최창흡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최창흡은 딸 최영이(崔榮伊)가 혼인할 나이가 되자 딸의 뜻에 따라 신분이나 나이의 차가 있음에도 양인 출신의 하급 마부인 조신철(趙信喆)과의 혼인을 허락하였다. 사형을 언도받고 형장으로 갈 때에 그는 아내와 딸에게 전갈을 보내어 “내 운명을 슬퍼하지 말라. 그것은 너무나 인성을 따른 감정이어서 진실한 신자에게는 마땅치 않은 일일 것이니, 오히려 천주를 찬미하고 이러한 큰 은혜를 천주께 감사하라”라고 전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참고문헌

  • 『헌종실록(憲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기해일기(己亥日記)』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11,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