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신철(趙信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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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96년(정조 20)~1839년(헌종 5) = 44세]. 조선 후기 순조(純祖)~헌종(憲宗) 때의 천주교도로, <기해박해(己亥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가롤로. 자는 경우(京友)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순조~헌종 시대 활동

‘덕철(德喆)’이라고도 불린 조신철(趙信喆)은 강원도 회양(淮陽)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나이 5세 때 어머니가 사망하고 난 후 가산을 탕진하자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몇 년 후 환속하고 이 집 저 집 떠돌아다니며 머슴살이를 하다가, 서울 서소문 밖으로 이주해 23세부터는 동지사행의 마부로 일을 하였다. 30세경 동지사 행차 때 정하상(丁夏祥)·유진길(劉進吉) 등을 만나 친분을 쌓은 후 유진길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기해일기(己亥日記)』]

1826년(순조 26) 유진길과 함께 북경(北京) 천주당을 방문하여 세례와 견진성사 등을 받았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동지사행의 마부로 일하며 북경교회와의 연락 및 <성직자 영입 운동> 등에 깊이 관여하였다. 1836(헌종 2)~1837(헌종 3)년 사이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과정에 적극 참여했던 조신철은 1839년(헌종 5) 기해박해가 발발하자 처가로 피신하였다가 5월 어느 날 처가에 습격한 포졸들이 어린 아이까지 잡아가는 것을 보고 따라가 자수하였다.[『기해일기』],[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 이후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그 과정 중 조신철의 집에서 북경교회에 방문했을 때 가져온 교회 물건 등이 발견되면서 더욱 더 심한 고초를 겪었다.[『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결국 조신철은 1839년 8월 19일 요서요언(妖書妖言)죄로 사형선고를 받아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사망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44세였다.(『헌종실록(憲宗實錄)』 5년 8월 19일),[『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헌종 5년 8월 19일],[『일성록(日省錄)』헌종 5년 8월 15일]

한편 그는 1925년 7월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어 성인 반열에 올랐다.

성품과 일화

조신철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조신철은 천주교 교리를 배운 후 본인도 그다지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지만 주변의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교리를 전파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특히 오랫동안 천주교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첫 번째 부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설득함으로써 입교시킨 뒤 사망케 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1839년 초 북경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꿈을 꾸었는데, 예수가 꿈에 나타나 그에게 “올해 순교의 큰 은혜를 내려주마”라고 말하였고 이 같은 꿈을 연속하여 2번 꾸었다고 한다. 서울에 돌아온 직후 기해박해가 발발하는 것을 본 조신철은 자신이 꾸었던 꿈이 현실로 나타날 것임을 깨닫고는 다른 신자들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는 따라가 자수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참고문헌

  • 『헌종실록(憲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일성록(日省錄)』
  • 『기해일기(己亥日記)』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10,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