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상(丁夏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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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95년(정조 19)~1839년(헌종 5) = 45세]. 조선 후기 정조(正祖)~헌종(憲宗) 때의 천주교도로, <기해박해(己亥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바오로.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정약종(丁若鍾)이고, 어머니는 유항고(柳恒故)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를 지낸 정재원(丁載遠)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정지해(丁志諧)이다. 정약전(丁若銓)과 정약용(丁若鏞)의 조카이기도 하다.

순조 시대 활동

1795년(정조 19) 경기도 양근의 분원(현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서 태어난 정하상(丁夏祥)은 7세가 되던 1801년(순조 1)에 <신유박해(辛酉迫害)>를 경험하였다. 당시 아버지 정약종과 이복 형 정철상(丁哲祥)은 천주교를 신봉하였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들 집안 식구들 대부분이 천주교를 믿었기 때문에 정하상도 어머니와 함께 옥에 갇혔다가 아버지가 사형된 후 석방되었으나 가산이 적몰되고 분원의 집도 파괴된 탓에 거처할 곳조차 없게 되었다. 이에 어머니는 정하상·정정혜(丁情惠) 남매를 데리고 정약종의 고향인 경기도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로 가서 생활을 하였고 이들 남매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으며 천주교 신앙을 이어갔다.[『기해일기(己亥日記)』],[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그런 가운데 집안 식구들의 박해가 심해지면서 이들 가족은 마재를 떠나 신자들의 집으로 피해 다니며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정하상은 좀 더 깊이 있는 교리와 한문을 배우기 위하여 신유박해 때 함경도 무산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살고 있던 조동섬(趙東暹)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돌아온 뒤 신자들과 접촉하면서 북경(北京) 왕래와 <성직자 영입 운동>에 필요한 비용 마련을 위해 노력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1816년(순조 16) 겨울 정하상은 동지사행에 섞여 북경으로 떠나 그곳의 천주당을 방문하였다. 정하상은 이 때 라자로회 소속의 리베이로 누네스(J. Ribeiro-Nunes) 신부를 만나 성사를 받았다. 당시 정하상을 도와주던 신자들 중에는 조숙(趙淑)·권(權) 데레사 부부가 있었는데 이들은 정하상을 자신의 집에 거처하도록 하고 북경에 가는데 필요한 모든 준비를 도맡아 하였다. 그런데 이들 부부는 정하상이 북경에서 돌아오기 하루 전날 체포되어 1819년(순조 19) 사망하였다. 이들 외에도 당시 정하상의 교회 활동을 돕는 이들로는 이경언(李景彦)과 현석문(玄錫文) 등이 있었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정하상은 1824년(순조 24) 역관유진길(劉進吉)을 만나게 되고 이들은 이후 함께 북경을 왕래하며 북경 선교사를 만나고 교황에게 보내는 서한을 작성하였다. 이 서한은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교황에게 보낸 2번째 서한으로, 당시 조선 교회의 어려운 상황 및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후 이 서한은 마카오를 거쳐 라틴어로 번역된 후 1827년(순조 27) 교황청 포교성성에 전달되었고, 결국 1831년(순조 31) 조선은 조선교구로 설정됨과 동시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정하상은 이 같은 결정이 이루어지는 동안 계속해서 북경을 왕래하며 선교사가 입국할 수 있는 경로를 북경 주교에게 자세하게 설명하기도 하였다.[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헌종 시대 활동

1833년(순조 33) 말 유진길과 조신철은 국경에서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맞이하여 서울정하상의 집으로 인도하였다. 이후 프랑스 선교사인 모방(Maubant) 신부가 1835년(헌종 1) 12월 봉황성 책문에서 정하상과 유진길 등을 만나 조선에 들어왔다. 이에 앞서 정하상은 브뤼기에르(Bruguiére) 주교에게서 받은 돈으로 서울 후동에 거처를 마련하여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 정정혜를 비롯하여 다른 몇 명의 신자들을 그곳에서 살도록 주선하였다.

유방제와 모방 신부의 명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사는 교우촌을 돌면서 신학생 선발에 관여한 정하상은 1836년(헌종 2) 양력 12월 3일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崔良業)·김대건(金大建)·최방제(崔方濟) 등과 함께 서울을 떠나 중국으로 출발하였다. 또 양력 12월 28일에는 책문에서 샤스탕(Chastan) 신부를 만나 조선으로 인도하였으며, 이듬해인 1837년(헌종 3) 12월에는 앵베르(Imbert) 주교를 조선으로 입국시켰다. 이후 정하상은 앵베르 주교의 활동을 돕는 복사로서 교우촌을 순방하거나 신자들을 돌보는데 전력을 기울였으며, 신학생으로도 선발되어 라틴어와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기해일기(己亥日記)』],[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이같이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던 정하상은 1839년(헌종 5)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모든 것을 멈추어야만 했다. 그는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후 체포와 순교를 예상하고 몇몇 교우들과 함께 박해자들에게 제출할 호교론을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상재상서(上宰相書)』이다. 1839년 6월 1일 가족과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된 정하상은 박해자들에게 『상재상서』를 제출하였고 사흘 후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이후 의금부로 이송된 정하상은 여러 차례의 추국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받았으나 끝까지 천주교회나 신자들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말은 하지 않으며 신앙을 고수하였다.[『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기해일기』],[『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헌종 5년 8월 8일],[『승정원일기』헌종 5년 8월 9일], [『승정원일기』헌종 5년 8월 10일], [『승정원일기』헌종 5년 8월 12일], [『승정원일기』헌종 5년 8월 13일], [『승정원일기』헌종 5년 8월 14일]

결국 그는 8월 15일 모반부도죄(謀叛不道罪)로 사형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사망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45세였다.(『헌종실록(憲宗實錄)』 5년 8월 14일),[『승정원일기』헌종 5년 8월 15일]

한편 그는 1925년 7월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어 성인 반열에 올랐다.

묘소

정하상의 시신은 참수 후 고향 근처 배알미리(현 하남시 배알미동)에 묻혔다. 그러다가 1981년 10월 파묘되는 과정에서 남은 유해가 거두어져 신장 성당에 안치되었고, 그해 12월 31일 다시 경기도 광주 천진암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참고문헌

  • 『헌종실록(憲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일성록(日省錄)』
  • 『기해일기(己亥日記)』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10,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