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우(崔雲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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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2년(중종 27)∼1605년(선조 38) = 74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의 문신. 유학자. 자는 시중(時中), 호는 향호(香湖)이다. 본관은 강릉(江陵)인데, 강화(江華) 출신으로서 강원도 강릉(江陵)의 신리(新里)에 살았다. 증조부는 군수(郡守)최자점(崔自霑)이고, 조부는 현감(縣監)최세건(崔世楗)이다. 양부는 진사(進士)최호(崔浩)이고, 생부는 교수(敎授) 최담(崔澹)이며 생모는 진주강씨(晉州姜氏)다. 도승지(都承旨)최연(崔演)의 조카다. 율곡(栗谷)이이(李珥)와 동향(同鄕) 친구다.

명종~선조 시대 활동

1552년(명종 7) 나이 21세 때 사마시(司馬試) 생원과 3등으로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오랫동안 공부하였지만, 대과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음직(蔭職)으로 목청전 참봉(穆淸殿參奉)·선릉 참봉(宣陵參奉) 등을 역임하였다. 선릉 참봉으로 있을 때 최운우는 상소를 올려서, 여러 선왕(先王)의 능침 아래에 각각 표석(表石)을 세우자고 건의하였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93「향호최공운우묘표(香湖崔公雲遇墓表)」 참고.) 그는 강화도(江華島)에서 출생하였으나, 1586년(선조 19) 강원도 강릉(江陵)의 신리(新里)로 이사하여 살았다.(『우계집(牛溪集)』 권6 참고.)

1595년(선조 28) 영의정유성룡(柳成龍)이 수령이 될 만한 자를 천거하였는데, 최운우를 비롯한 한백겸(韓百謙)·채애선(蔡愛先) 등 30명이었다. 영남 지방 선비가 대부분인 데다가 간혹 학생으로서 발탁된 자도 있었으므로, 인선이 너무 혼잡스럽다는 비판이 있었고, 사림(士林)의 여론도 비등하였다.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재능이 수령이 될 만한 자를 천거하여 나라에서 파격적으로 등용하는 것은 수령의 적임자를 선발하기 위함입니다. 지난번에 비변사(備邊司)에서 천거한 자들은 혼잡스런 폐단이 없지 않아서 사림의 여론이 매우 타당하지 않게 여기니, 해당 조(曹)로 하여금 다시 가려 뽑게 하소서.” 하였다. 그리하여 이조에서 다시 가려 뽑아, 1595년(선조 28) 6월 최운우는 횡성현감(橫城縣監)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 참고.)

그는 횡성현감의 임기를 마치고, 관직에 나아갈 뜻이 없어서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는 율곡이이와 동향이어서, 일찍부터 이이와 사귀었고, 우계(牛溪)성혼(成渾)과도 교제하였다. 최운우는 이이·성혼보다 나이가 3~4세 위였으나, 나이를 따지지 않고 두 사람을 스승처럼 모시면서 그들과 서신을 교환하고,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논하였다. 그의 숙부 최연은 윤원형(尹元衡)의 소윤파로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사림파(士林派)를 숙청하였던 인물이다. 그러나 최운우는 이이·성혼 등 사림파 선비와 가깝게 지냈다. 그는 주자(朱子)의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안동(安東)의 도산서원(陶山書院)으로 퇴계(退溪)이황(李滉)을 찾아가서 주자의 이기(理氣)와 태극(太極) 등에 관한 여러 학설을 토론하고, 그 강론을 들었다. 그는 서인과 동인의 영수들과 교우하면서, 노년에 성리학을 연구에 몰두하여, 많은 글을 남겼다. 1605년(선조 38) 강원도 강릉의 신리에서 노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74세였다.

저서로 『향호집(香湖集)』 2권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최운우는 어려서부터 ‘불인지심(不忍之心)’이 있어서, 아이들이 잡아놓은 물고기를 보면 번번이 몰래 놓아주었는데, 한번은 길을 가던 중이 이를 보고 어린 최운우를 안아서 바위 위에 앉혀놓고 절을 한 다음에 떠났다고 한다. 그는 일찍부터 이이와 사귀었는데, 이이가 주자의 성리학을 공부하는 것을 보고 그도 주자학(朱子學)을 탐구하려는 의욕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안동의 도산서원으로 이황을 찾아가서 주자의 학설에 대해 공부하였다. 벼슬에 나가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아 벼슬길은 아예 포기하였다. 그 뒤에 이이의 소개로 파주(坡州)의 우계로 성혼을 찾아가서 성리학을 토론하였는데, 성혼이 그를 높이 추앙하고 그 학식을 인정하였다. 최운우는 이황과 이이·성혼의 문하에 왕래하고 학문을 연마하면서, 학문을 연구하는 데 온전히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고 더욱 굳게 다짐하였다. 율곡이이는 최운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학자가 격물치지를 궁리하는 데에 주력하지 않으면 실제 이치[實理]의 근본을 찾아낼 수 없다. 내가 이것을 호원(浩原)성혼에게 말해주었는데, 지금 또 그대에게 말해주는 것이다.”고 하였다.(「묘표」 참고.)

1545년(명종 즉위) 최운우가 14세가 되었을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 소윤의 윤원형과 이기(李芑) 등이, 대윤(大尹)의 윤임(尹任)·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 사림파 10여 명을 처참하게 죽였다. 그때 그의 숙부 최연은 좌승지였는데, 병조 판서이기의 추천으로, 대윤의 죄상을 밝히고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는 글을 짓게 되었다. 그 소문을 들은 최운우는 숙부 최연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써서 보내고, 그 글을 제발 짓지 말도록 간하였다. 끝내 최연이 그 효유문(曉諭文)을 지었는데, 최연은 그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에 책봉되었다. 30여 년이 지난 후에, 선조 때 사림파가 득세하자, 죽은 최연의 공신 봉작을 삭탈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최운우는 숙부 최연 때문에 사림파의 많은 선비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냉대를 받았다. 이에 이황은 최운우와 친한 어떤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최운우에게 자신을 숨겨서 사람들의 이목(耳目)과 손가락질을 피하도록 권면하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비문과 후손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93「향호최공운우묘표(香湖崔公雲遇墓表)」) 강원도 강릉의 향현사우(鄕賢祠宇)에 최응현(崔應賢)·최수성(崔壽城)과 함께 제향되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4 참고.)

부인 강릉김씨(江陵金氏)는 선비 김창수(金昌壽)의 딸인데, 2남 1녀를 두었다. 큰아들은 최경선(崔景璿)이고, 둘째 아들은 최경찬(崔景瓚)이며, 외동딸은 최복경(崔復慶)에게 시집갔다. (「묘갈명」 참고.)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사마방목(司馬榜目)』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송자대전(宋子大全)』
  • 『향호집(香湖集)』
  • 『청선고(淸選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약포집(藥圃集)』
  • 『어우집(於于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