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남영(鎭南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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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고종 때 전국으로 확대 개편하면서 청주(淸州)에 설치했던 친군영(親軍營).

개설

임오군란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중앙 군영이 제구실을 못하게 되자 궁궐의 수비와 도성의 치안 유지를 위해 청나라의 도움을 받아서 1882년(고종 19)에 새로이 신건친군좌·우영(新建親軍左·右營)을 설치하였다. 그 뒤 청나라의 영향력을 줄여가면서 신식 훈련도 겸하여 실시하는 가운데 친군영을 확대하였다. 이듬해에는 남한산성의 교련병대(敎鍊兵隊)를 중심으로 친군전영(親軍前營)를 설치하였고‚ 1884년(고종 21)에는 친군후영(親軍後營)과 별영(別營)을 설치하여 친군영 제도에 대한 정비 작업을 일단락 지었다.

이와 함께 구래의 용호영(龍虎營),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 총융청(摠戎廳) 등을 모두 폐지하고 그 병력을 친군영에 분속시켰다. 이어서 지방군으로 친군영 제도를 확대 실시하였다. 1885년(고종 22) 평양감영에 친군서영(親軍西營)과 해방영(海防營)을‚ 1886년(고종 23)에는 강화부에 친군심영(親軍沁營)을 설치하였다. 1887년(고종 24)에 경상감영에 남영(南營), 전라감영에 무남영(武南營), 함경도 경성에 북영(北營), 강원도에 진어영(鎭禦營), 그리고 충청도 청주에는 진남영(鎭南營)을 설치하였다. 진남영도 지방군에 대한 중앙 통제를 강화하는 가운데 갑오농민전쟁에 동원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종의 친정이 단행된 뒤 추진되었던 개화 정책의 하나로 1881년 최초의 신식 군대인 교련병대, 즉 별기군(別技軍)이 창설되었다. 이를 계기로 신식 군대와 구식 군대의 갈등이 첨예화되는 가운데 후자의 차별 대우에 따른 불만이 폭발하여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그 후유증으로 몹시 혼란해졌던 궁궐의 수비와 도성의 치안 유지를 위해 당시 서울에 주둔하였던 청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아서 1882년에 새로이 신건친군좌·우영을 설치하였다. 그 뒤 청나라의 영향력을 줄여가면서 신식 훈련도 겸하여 실시하는 가운데 친군영을 확대하였다.

1883년 박영효가 광주유수 시절에 모집하여 일본식으로 훈련시켰던 남한산성의 교련병대를 중심으로 친군전영을 설치하였고, 이듬해에는 임오군란으로 해체되다시피 하였던 교련병대를 중심으로 친군후영을 설치하였다. 아울러 중앙군의 통수 체제를 통일시키기 위해 구래의 용호영,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 등을 모두 폐지하고 그 병력을 친군영에 분속시켰다. 그 과정에서 갑신정변 직후인 1884년 11월에 친군별영을 신설함으로써 5군영 체제로 확립되었다.

한편 고종은 친정 체제를 보다 확고히 다지기 위해 친군영을 지방군에까지 확대하였다. 1885년 평양감영에 친군서영 등을 설치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침내 1887년 충청도 청주에는 진남영을 세웠다. 이들 지방군을 친군으로 부르며 주기적으로 서울로 불러올려 훈련을 친히 관람하고 시상도 실시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지방군에게 국왕의 친군이라는 인식을 한층 분명하게 심어주고자 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군영의 최고 책임자는 삼도육군통어사겸충청도병마절도사(三道陸軍統禦使兼忠淸道兵馬節度使) 청주목사(淸洲牧使) 친군진남영외사(親軍鎭南營外使)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휘부에는 병방(兵房), 좌우영관(左右領官), 군사마(軍司馬), 문안(文案), 초관(哨官), 대관(隊官) 등이 있었으며, 다시 군의(軍醫), 초장(哨長), 교장(敎長), 교사(敎師) 등이 중간급으로 기능하였으며, 다시 그 아래에는 초서(哨書), 교서(敎書), 규칙십장(糾飭什長), 병정(兵丁), 장부(長夫), 후병(候兵), 화병(火兵), 기찰포교(譏察捕校), 아병(牙兵)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변천

1895년에 단행된 군제개편으로 폐지되었다.

의의

고종이 친청 체제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 군제개편을 실시해서 친군영을 설치하고 이것을 지방군으로까지 확대하여 운영하고자 했던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裵亢燮, 『19世紀 朝鮮의 軍事制度 硏究』, 國學資料院,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