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소(鑄字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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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궐 안에서 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 내던 부서.

개설

주자소(鑄字所)는 조선시대 활자의 주조를 관장하던 관서로, 명칭은 1403년(태종 3) 태종이 설치한 주자소에서 비롯되었다(『태종실록』 3년 2월 13일). 주자소의 기능은 활자의 주조, 판목(板木)과 주자(鑄字) 관리, 서적의 편찬, 인출(印出), 반사(頒賜) 즉 임금이 녹봉이나 물건을 내려 나누어 주던 일 및 판매, 장서와 문서 인출 등의 서적 인쇄와 관련된 업무 가운데 주로 활자의 주조, 판목 및 주자의 관리였다.

국가의 중앙 관서가 주자 인쇄의 업무를 수행한 것은 고려 문종 때 설치된 서적점(書籍店)과, 서적점과는 별도로 고려 숙종 때 설치된 서적포(書籍鋪)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서적점은 설치된 뒤 여러 번의 변화가 있었으나 고종조까지 존속하며 서적을 인출하여 유통시키는 업무를 하였다. 그 당시 인쇄 기관은 목판을 새기고 인출할 뿐 아니라 주자 인쇄의 기술도 가지고 있었는데,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와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의 인출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원(元)의 내정 간섭이 심해진 충렬왕대에 이르면 전교서(典校署), 서적점, 우문관(右文館), 진현관(進賢館) 등의 기관이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으로 병합되고 기능도 축소되었다. 고려말기가 되자 원에 대한 배척과 자주 의식이 높아짐에 따라 서적포를 두어 책을 주자로 인쇄해 학문을 증진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 1392년(고려 공양왕 4) 다시 서적원(書籍院)을 설치하고 주자 인쇄를 위한 직책인 영(令)과 승(丞)을 두었다.

조선시대 주자소의 설립은 고려시대부터 축적되어 온 금속활자 주조술의 발달과 기관 설립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선 건국 후 태조는 고려의 서적포 제도를 답습하여 서적원을 설치하고 금속활자를 주조하여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여러 서적을 간행하는 한편, 시문집·의학 서적·군사 서적·법전 등도 인쇄하고자 하였다.

한편, 중국에서 수입해 오는 한정된 양의 서적으로는 당시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을 타개하고, 왕권 강화에 후원이 되어 줄 새로운 이념인 성리학의 원활한 보급을 위해서도 서적의 인쇄와 유통이 절실히 요구되었기 때문에 인쇄 활동의 밑바탕이 되는 주자 기관의 설립은 긴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자소의 본격적인 설립은 조선왕조의 기틀이 안정되는 태종대에 들어서 가능했다. 태종은 1401년 즉위하자마자 태조 때 설치한 비서감을 교서관(校書館)으로 개칭하고 서적원도 이곳으로 병합하였다(『태종실록』 1년 7월 13일). 이어 교서관의 인쇄 활동을 원활하게 하고 숭유우문(崇儒右文)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서 1403년 2월 주자소를 신설하여 승정원 직속 기관으로 두었다.

주자소와 관련된 기록으로 『주자소응행절목(鑄字所應行節目)』이 남아 있다. 이 자료는 조선후기 순조 연간에 국가에서 주조한 활자나 목판을 관리하고 책의 간행을 담당하던 주자소의 인쇄 관련 물품과 관리 규정, 간행한 책의 재고 등을 기록한 책이다. 특히 『주자소응행절목』에는 활자의 종류, 수량, 찍은 책의 현황을 비롯하여 책판(冊版)의 소장 현황 및 동판(銅版) 등에 대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태종이 처음 주자소를 설치할 당시 주자소는 승정원 소속으로, 주자소의 소관 업무는 승지(承旨) 2명이 주관하고, 따로 2품 이상의 문신 1명과 승지 1명을 제조(提調)로 삼았으며, 그 밖에 교서(校書), 교리(敎理), 참외(參外) 등 2~3명을 두어 업무를 나누어 맡게 하였다.

그리하여 정2품 대제학(大提學) 이직(李稷)을 비롯한 4명을 제조로 임명하였고, 1421년(세종 3)에는 경자자(庚子字)를 개량함에 있어 이천(李蕆)과 남급(南汲)을 제조로 임명하였으며, 1434년(세종 16) 갑인자(甲寅字)를 주조할 때는 따로 이천·김돈(金墩)·김진(金鎭)·장영실(蔣英實)·이세형(李世衡)·정척(鄭陟)·이순지(李純之) 등을 제조로 임명하였다. 이처럼 설립 당시 주자소의 기본적인 조직이나 직제는 활자를 개량하거나 새로이 활자를 주조할 때에만 업무를 감독하는 제조를 임명하고 필요한 인원은 그 수요에 따라 교서관에서 충당하고, 주어진 업무가 끝나면 몇 명만 유임시켜 주자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1436년(세종 17) 주자소가 경복궁으로 이관될 때에는 승지 2명에게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으며(『세종실록』 17년 9월 12일), 이듬해 10월 7일에는 주자소는 책을 인쇄하는 기능이 중요하므로 담당자를 제거(提擧)·별좌(別坐)라 칭하고 제조로 하여금 평가하여 만기까지 근무하고 2명을 구임(久任)으로 정하여 30개월에 교체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8년 10월 7일). 1452년(문종 2)에는 주자소의 별좌 7명 가운데 2명을 감원하기도 하였다.

주자소에는 필요한 잡직관(雜織官)과 공장(工匠)도 두고 있었다. 그중 서원(書員)은 실차관 15명, 예차(預差) 9명 등 모두 24명이었는데, 1442년(세종 24) 10월에는 10명이 늘어나 34명에 이르렀다. 관원들이 늘어나자 1453년(단종 1)에는 불경을 찍어 내기 위해 설치한 책방(冊房)을 주자소에 병합하였다. 주자소로 서적의 일을 모두 이룰 수 있음에도, 책방을 두어 관원의 수가 많고 일의 실효가 높지 않으므로 책방을 혁파하자는 건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1460년(세조 6) 5월에는 업무의 효율을 높이고자 주자소를 교서관 소속으로 옮기고 전교서로 개칭하였다(『단종실록』 1년 5월 2일). 주자 인쇄 업무가 본래 교서관 소관이고, 주자소는 교서관의 업무를 확장·설치한 데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주자소는 교서관에 소속되어 주자 인쇄 업무를 담당하였는데,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주자소가 관제상의 정식 아문(衙門)으로 편입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직제와 정원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참고로 『경국대전』에 나오는 교서관의 직제는 야장(冶匠) 6명, 활자를 조판하는 기술자인 균자장(均字匠) 40명, 책을 찍어 내는 인출장(印出匠) 20명, 글자를 새기는 각자장(刻字匠) 14명, 주물 기술자인 주장(鑄匠) 8명, 조각장(彫刻匠) 8명, 목장(木匠) 2명, 지장(紙匠) 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자소의 직제도 교서관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주자소가 담당했던 주요 기능은 활자의 주조, 판목과 주자 관리, 서적의 편찬·인출·반사 및 판매, 장서와 문서 인출로서, 얼핏 보기에 서적의 편찬과 장서 기능의 측면에서 교서관의 역할과 비슷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주자소는 1460년 5월 업무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교서관으로 소속을 옮겼는데, 이러한 까닭으로 교서관의 업무 분장에 있어서 다소 모호한 점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교서관이 주로 서적의 편찬 업무를 총괄적으로 다루었다면, 주자소는 세부적으로 활자의 주조·판목과 주자를 관리하였다는 점에서 두 기관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1403년 2월 주자소를 설치하고 금속활자를 주조한 이래로 조선전기에 주조된 금속활자는 1403년 계미자(癸未字)를 시작으로 경자자(1420)·갑인자(1434)·병진자(丙辰字, 1436)·경오자(庚午字, 1450)·을해자(乙亥字, 1455)·정축자(丁丑字, 1457)·을유자(乙酉字, 1465)·갑진자(甲辰字, 1484)·계축자(癸丑字, 1493)·병자자(丙子字, 1516)·경진자(庚辰字, 1580)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이들 활자로 간행한 책의 종류는 수백여 종이나 된다. 간행 대상은 집현전에서 편찬한 서적이나 국내에서 수집된 개인의 저작, 지방에서 진상한 서적, 중국에서 수입된 서적이 주를 이루었다.

만들어진 활자는 2품 이상 1명, 승지 1명을 제조로 삼아 교서교리(校書校理)와 참외 2~3명이 나누어 관장하게 하고 교체할 때에도 사유를 자세히 기록하여 인수인계를 철저히 하도록 하였다. 그 밖에 서적의 편찬·인출·반사 및 판매, 장서와 문서 인출 등은 교서관과 맞물려진 업무이다.

조선초기의 활판 인쇄로 찍은 서적의 양은 활자의 주조 기술과 조판 기술의 미숙으로 말미암아 소량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왕실과 중앙 관사에 우선 배치하고 제한된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일반인들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는 부족하였다. 부족한 도서를 공급하기 위해 주자소에서 간행된 책을 판매하는 방안은 설립 초기부터 제기되었으며, 이후 일반인들에게 서적을 보급하기 위하여 교서관에서 인출한 서적을 대상으로 종이·쌀·콩 등을 받고 판매하고 그 대가로 서적을 더욱 많이 공급하는 데 힘썼다.

주자소는 왕명에 의해 문서를 인출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1431년(세종 13)에는 이문등록(吏文謄錄) 안의 주요 문서를 골라내어 주자소로 하여금 인출하게 하고(『세종실록』 13년 1월 21일), 같은 해 6월에는 휼형(恤刑)의 교지를 주자소에서 인출하도록 하여 곳곳에 하사하는 등, 주로 왕명을 나라 안팎에 선포할 때 주자소가 담당하여 인출하였다(『세종실록』 13년 6월 12일).

변천

1403년 태종에 의해 주자소가 설치된 뒤 처음으로 주조한 활자는 계미자이다. 주자소는 승정원에 속하였던 초기에는 한성의 남부 훈도방에 있었다가, 1435년(세종 17) 경복궁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1451년(문종 1) 문종은 아버지 세종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대군들이 행하던 불경 인쇄 작업이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주자소를 잠시 폐지하기도 하였다.

1453년 5월 윤성원(尹誠源)이 공장(工匠)과 사금(使今)을 두 곳으로 나누어 일을 시키는 폐단이 발생하므로 세종조에 설치하였던 책방을 속히 혁파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책방을 주자소에 병합하였다. 1460년(세조 6) 5월 승정원 소속에서 교서관 소속으로 옮기고 교서관을 전교서라 개칭하였다.

조선시대 전반을 거쳐 활자를 주조할 때는 통상적으로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임시로 설치하거나 지방 감영 또는 수어청(守禦廳) 등에 명하여 만들었으며, 완성된 주자는 교서관으로 보내져 인쇄에 사용되었다. 이처럼 주자소는 교서관에 속하여 운영되어 오다가 정조 때에 이르러 조선초기와 같이 따로 분리되어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여 내각으로 삼고 교서관을 외각으로 삼아 편찬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1794년(정조 18)에는 창경궁의 예전 홍문관 자리에 주자 기관을 새로 설치하고 감인소(監印所)로 명명하였다가, 주자소를 설치한 태종의 뜻을 기려 다시 주자소로 개칭하였다.

이후 주자소 건물 옆에 춘방(春坊)과 계방(桂坊)의 직소(直所)가 설치되자 주자소를 옮길 필요가 생겨, 1800년(정조 24) 직제학(直提學)이만수(李晩秀)가 주자소를 의장고(儀仗庫)로 옮길 것을 건의함에 따라 홍화문(弘化門) 오른쪽 익랑(翼廊)의 의장고 대청과 동북위장소(東北衛將所) 및 어영군번소(御營軍番所)를 아우르는 10여 칸의 건물로 이전이 확정되었다. 주자소의 부속 건물로는 새로 찍은 책들을 보관하는 십자각고(十字閣庫)와 책을 찍기 위해 새긴 목판과 활자 인쇄에 필요한 각종 인쇄 도구를 보관하는 판당(板堂)이 있었다(『정조실록』 24년 윤4월 13일).

이처럼 정조 때 다시 설치되어 기능을 원활하게 수행하던 주자소는 순조 때에 이르러 궁궐 안의 공간 조정으로 인하여 부득이 옮겨지게 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숙직하는 관리도 없어졌으며, 서책·주자·책판의 유무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등 관리가 소홀해졌다. 이에 상황을 개선을 위하여 몇 가지 방안을 모색하였다. 또한 1814년(순조 14)에 절목을 만들어 운영의 규칙을 제정하는 등 개선의 의지를 보였으나 관리의 허술함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1857년(철종 8) 주자장(鑄字欌) 일체를 보수하고자 하였으나 10월 임시로 지은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빈전도감(殯殿都監)에서 시작된 화재로 주자소의 대청과 판당은 물론 정유자·한구자·정리자 등 보관된 활자와 인쇄 도구, 책판 등이 불타고 일부만 남게 되었다(『철종실록』 8년 10월 15일). 1858년 화재 복구책으로 주자소를 균역청에 설치하여 정리자와 한구자를 다시 주조하였고, 이들 활자는 대한제국 시기까지 교서관의 인쇄에 이용되었다.

의의

주자소는 1403년 태종에 의해 설치된 이래로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자를 주조하였고, 교서관은 이를 이용하여 수많은 서적을 인쇄하였다. 주자소의 설립은 고려시대부터 축적되어 온 금속활자 주조술의 발달과 기관 설립의 경험에서 비롯한 것으로, 주자소의 인쇄 사업은 한국의 금속활자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세종조에 주조된 경자자와 갑인자 등은 최고도로 발달한 주자 기술을 보여 주는 것으로, 활자 자체의 미적인 면에서도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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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http://thesauru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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