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주대의(尊周大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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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보수적 유학자와 관료들 사이에 팽배하였던 존명반청(尊明反淸)의 이념.

개설

‘존주대의’는 17세기에 후금(後金)이 등장하여 명(明)을 정복하고 청(淸)을 세운 명·청 교체기에 정통 유학자와 관료들 사이에서 형성되어 조선후기 내내 지식인 계층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던 주요 이념이 되었다. 이는 중화 국가인 명과 중화 문화를 존중 계승하고 오랑캐 국가인 청을 배척하자는 보수적인 유학자들의 의식이나 신념을 말한다.

내용 및 특징

‘존주(尊周)’는 중국 춘추시대에 주(周)나라를 지키고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유력 제후국 오패(五覇)의 주창자들이 내세운 정치적 구호였으나, 공자가 『춘추』에서 이를 수용하여 정통 중화 국가의 수호 이념으로 삼았다. ‘존주대의’는 ‘춘추대의’라고 불리는 공자의 정의(正義) 관념 중에서도 중요한 내용이 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후기에 중화 국가인 명에 대한 존중 의식을 ‘존주’로 칭하게 되었고, 『존주대의록(尊周大義錄)』, 『존주휘편(尊周彙編)』 등 많은 문헌이 편찬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본래 몽고족이나 만주족(여진족)을 오랑캐로 경멸하고 한족(漢族)의 중화 문화를 존중하는 풍조가 강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명이 원군을 파견하여 도와준 이후에는 이러한 의식이 더욱 증대되었다. 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에는 만주족에 대한 증오와 원한이 깊어졌고 한때 북벌(北伐)을 도모하는 등 복수설치(復讐雪恥)를 다짐하는 의식도 팽배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강대국인 청을 공격하여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존주대의’는 정치적으로 구현될 수 없었고, 재야 학자들의 구호나 이념으로 남게 되었다.

변천

1644년에 명이 망하고 청이 중국을 지배한 이후 100여 년이 지난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북학자(北學者)들과 같은 일부 유학자들 사이에서 발달한 청의 문화를 배우자는 새로운 경향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중화문화를 계승하고 오랑캐를 배척하자는 의식은 완강하여 19세기 초에 서학(西學) 즉 천주교를 배척하는 ‘숭정학(崇正學) 벽이단(闢異端)’의 사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개항 후에는 외세를 배격하는 ‘위정척사론(爲正斥邪論)’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존주대의록(尊周大義錄)』
  • 『존주휘편(尊周彙編)』
  • 손승철, 「북학의의 ‘존주론’에 대한 성격 분석」, 『인문학연구』17, 강원대학교, 1983.
  • 이영춘, 「우암 송시열의 존주사상」, 『청계사학』2, 1985.
  • 조성산, 「송시열의 성리학 이해와 현실관」, 『한국사학보』17, 2004.
  • 허태용, 「17세기 말~18세기 초 존주론의 강화와 『삼국지연의』의 유행」, 『한국사학보』15, 2003.
  • 三浦國雄, 「17세기 조선에 있어서의 정통과 이단 -송시열과 윤휴-」, 『민족문화』8, 1982.
  • 山內弘一, 「朴齊家に於ける「北學」と慕華意識」, 『上智史學』43, 上智大學史學會,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