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치(曺尙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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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 ?]. 조선 초기 세종∼세조 때의 문신. 자는 자경(子景), 호는 정재(靜齋) · 단고(丹皐)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주거지는 경상도 영천(永川)이다. 아버지는 강계도병마사(江界道兵馬使)조신충(曺信忠)이고, 어머니 영천최씨(永川崔氏)는 최중연(崔中淵)의 딸이다. 고려 좌정승(左政丞)조익청(曺益淸)의 손자이며, 야은(冶隱)길재(吉再)의 문인이기도 하다.

세종~단종 시대의 활동

1419년(세종1) 정시(庭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 장원을 하고, 사재감(司宰監) 주부(注簿)에 보임되었다. 그때 상왕(上王)인 태종이 그를 불러서, “네가 고려 신하 조신충의 아들이냐?” 묻고,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임명하여 임금에게 직언(直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상치(曺尙治)는 고향의 늙은 부모를 공양하기 위하여 경상도의 수령을 자청하여 합천(陜川)과 함양(咸陽)의 지군사(知郡事)를 연달아 역임하였다. 마침 세종이 집현전(集賢殿)을 개설하고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엘리트를 초청할 적에 조상치도 집현전 학사(學士)로 들어가서,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였다.

1424년(세종6) 사간원에 들어가서 우정언(右正言)과 좌정언(左正言)을 역임하였다. 1425년(세종7) 좌정언으로 있을 때 조상치가 “금년의 각 도는 한재(旱災)로 인하여 농사를 실패하였는데, 경기가 더욱 심합니다. 청하건대 명년 봄의 순수(巡狩)를 정지하소서.”라고 아뢰어, 세종이 강무를 그만두었다. 1440년(세종6) 사간원 좌헌납(左獻納)으로 승진하였다.

조상치는 세종 시대에는 사간원 등에서 활동하다가, 단종 때 다시 집현전으로 돌아가서, 1455년(단종3)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집현전(集賢殿)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세종 · 문종 · 단종 3대에 걸쳐 그는 성삼문 · 박팽년과 더불어 집현전에 봉직하면서 임금들의 사랑과 신임을 받았다.

세조 시대 저항과 은둔

아버지 조신충은 고려 우왕(禑王) 때 문과에 급제한 장수였는데, 우왕과 창왕(昌王)이 연달아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 영천(永川)으로 귀향하여 은거하였다. 조신충은 고려의 충신 이색(李穡)과 조선의 개국공신 하륜(河崙)과 아주 가까웠다. 1396년(태조5) 하륜이 천거하여 강계도병마사에 임명되었으나, 서울에 올라와서 이를 사양하고, 이색을 따라서 조선 왕조를 섬기지 않았다. 조신충이 일찍이 아들 조상치에게 말하기를, “나는 고려조 재상의 아들로서 과거에 올라서 녹을 먹었으니 마땅히 절의를 지켜야 하지만, 너는 나라가 바뀐 뒤에 태어났으므로 스스로 숨어서 살아갈 의리가 없느니라.” 하고, 벼슬하기를 권유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뜻을 굽혀 상경하여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였다.(『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조상치유사(曺尙治遺事)」 참조) 세종 · 문종 두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아 오래도록 화직(華職)에 있었는데, 집현전이 창설되자, 학사(學士)로 초빙되어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그러나 1453년(단종1)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 일파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서 김종서(金宗瑞) · 황보인(皇甫仁) 등 3공 6경을 모두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1455년(세조1) 단종의 선위를 받아 세조가 등극하자, 그는 대문을 닫고 병을 핑계로 등극을 하례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라에서 그를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녹훈(錄勳)하였다. 이에 그는 은퇴하기로 결심하고 세조에게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의 벼슬에 올랐습니다. 복이 너무 지나치니 마땅히 물러가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세조가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예조 참판을 제수하였으나, 그는 다릿병을 칭탁하고 대궐에 들어가서 사은하지 않았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세조가 백관들을 시켜서 그를 동대문까지 전송하게 하니, 사흘만에 비로소 서울을 벗어나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영천(永川) 의 창수면(滄水面)에 있는 마단촌(麻丹村)으로 물러가서 은거하여 살다가 죽었는데, 종신토록 서쪽을 향하여 앉지 않았다고 한다. 일찍이 큰 돌 하나를 얻어서, 그 표면에 글을 새기기를, ‘노산조 부제학 포인 조상치의 묘[魯山朝副提學逋人曺尙治之墓]’라 하고, 스스로 해설하기를, “‘노산조’라고 한 것은 지금 임금의 신하가 아닌 것을 밝힌 것이고, ‘부제학’이라 쓴 것은 사실을 빠뜨리지 않으려는 것이고, ‘포인’이라고 쓴 것은 망명하여 도망한 신하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이 돌을 묘소 앞에 세워라.” 하였으나, 그가 죽은 뒤에 여러 아들들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그 돌을 땅에 묻어버렸다. 그리고 그의 시문은 임종할 때에 모두 불태워버렸다.

성품과 일화

조상치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부귀한 집에서 자라났으나 게으른 습관이 없었고, 날마다 글을 부지런히 읽었으므로, 원래 재능이 많은데다 학업이 날로 진취되어 일찍부터 명성(名聲)이 자자하였다. 젊어서 그는 사문(斯文)을 떨쳐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그는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날 때에도 겉으로는 온순하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행동하였다. 말하자면, 은미한 가운데 자기 뜻을 드러내고, 수용하는 가운데 자기 절개를 지켰던 것이다.

단종이 영월에서 지은 「두견새[子規]의 노래」를 전해 듣고, 그는 통곡하면서 이에 화답하는 「두견새[子規]」라는 사부(詞賦)를 읊기를, “접동, 접동, 접동새 우는 소리[子規啼子規啼]. 달밤에 산속에서 무엇을 호소하는가[夜月空山何所訴].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不如歸不如歸]. 떠나온 파촉의 땅을 날아서 건너고자[望裡巴岑飛欲度]. 뭇 새들은 모두 보금자리를 찾아드는데[看他衆鳥摠安巢], 그대만 홀로 꽃가지에 피를 토하는구나[獨向花枝血謾吐]. 그 얼굴 외롭고 그 모습 초췌하니[形單影孤貌樵悴], 존숭(尊崇)도 안 하는데, 그 누가 그대를 돌보리[不肯尊崇誰爾顧]. 슬프다, 인간 원한이 어찌 그대뿐이랴[嗚呼人間冤恨豈獨爾]. 의사충신(義士忠臣)의 강개와 불평을[義士忠臣增慷慨激不平]. 손을 꼽아도 다 못 셀 것을[屈指難盡數].”라고 하였다.(『취원당수록(聚遠堂手錄)』참조) 부제학임영(林泳)이 지은 묘갈명(『창계집(滄溪集)』 권17)에서도 “조상치는 성삼문 · 박팽년과 길은 달라도 가는 곳은 같았다.” 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묘소는 경상도 영천군(永川郡) 동쪽 고소곡(高蘇谷)의 언덕에 있는데, 임영이 지은 묘갈명이 남아 있다. 1791년(정조15) 정조가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우고 추향(追享)할 사람을 정할 때 조상치도 성삼문 · 박팽년과 함께 배향되었다. 부인 의성김씨(義城金氏)는 목사(牧使)김우해(金于海)의 딸로 자녀는 6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군수조변흥(曺變興), 차남은 승문원(承文院) 지사(知事)조변륭(趙變隆), 3남은 예조 참의조변안(趙變安)으로, 이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고, 막내아들 조변옹(曺變雍)은 무과에 급제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창계집(滄溪集)』
  • 『동문선(東文選)』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면암집(勉菴集)』
  • 『불우헌집(不憂軒集)』
  • 『춘정집(春亭集)』
  • 『취원당수록(聚遠堂手錄)』
  • 『홍재전서(弘齋全書)』
  • 『이존록(彝尊錄)』
  • 『경재유고(敬齋遺稿)』
  • 『관란유고(觀瀾遺稿)』
  • 『어계집(漁溪集)』
  • 『점필재집(佔畢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