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후(鄭東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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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59년(효종 10)∼1735년(영조 11) = 77세]. 조선 후기 숙종(肅宗)~영조(英祖) 때의 문신.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다. 자는 후경(厚卿)이고, 호는 송애(松崖)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거주지는 함평(咸平)이다. 아버지는 정여탁(鄭汝倬)이며, 어머니 행주 기씨(幸州奇氏)는 기수백(奇秀栢)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정재흥(鄭再興)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정돈(鄭燉)이다.

숙종 시대 활동

1683년(숙종 9)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5세였다.[『방목(榜目)』]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1703년(숙종 29) 성균관의 추천을 받아 사릉(思陵)봉사(奉事)에 임명되었고, 차례에 따라 여러 관직을 거친 후 군자감(軍資監)봉사(奉事)로 전임되었다.[『도암집(陶菴集)』 권34 「승지정공묘갈(承旨鄭公墓碣)」 이하 「정동후묘갈」로 약칭] 1705년(숙종 31) 식년(式年)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7세였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31년 4월 11일, 『방목』] 처음에 6품의 성균관 전적(典籍)에 보임되었다가, 형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 야대(夜對)할 때에 사서(史書)를 겸하여 독서한 사람이라고 일컬어져 숙종이 가상히 여겼다. 이어 병조로 옮겼다가, 외직으로 나가서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가 되었다.[「정동후묘갈」]

성균관 직강(直講)을 지낸 뒤에, 곧이어 경성판관(鏡城判官)에 보임되었는데, 고을을 다스리는 방식이 청렴 공명하였고 학교를 흥기하여 선비들을 육성하는 일을 우선으로 여겼다. 임기가 만료되자,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외직으로 나가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와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를 거쳐 울산부사(蔚山府使)가 되었는데, 고을 선비들의 시험을 관장할 때 마음가짐을 지극히 공정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 사이에 성균관 사예(司藝)와 성균관 사성(司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 군자감(軍資監)정(正)봉상시(奉常寺) 정, 사복시(司僕寺) 정 등을 역임하였다.[「정동후묘갈」]

1710년(숙종 36) 4월 사헌부 장령이 되었는데, 금제(禁制)를 엄격하게 적용하여 청탁이나 알선 등의 부정한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숙종실록』숙종 36년 4월 29일, 「정동후묘갈」] 1717년(숙종 43) 6월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1719년(숙종 45) 제주목사(濟州牧使)에 임명되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하였다.[『숙종실록』숙종 43년 6월 23일, 숙종 45년 11월 4일] 그 당시 제주도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정성껏 기민들을 진휼(賑恤)하여 백성들 가운데 굶어죽는 사람이 없었다.[「정동후묘갈」]

영조 시대 활동

1724년(영조 즉위년) 8월 영조가 즉위하였을 때 정동후는 관직에서 파면되어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정동후묘갈」] 그해 11월 그는 상소를 올려 김일경(金一鏡) 등의 죄를 논박하던 중에 삼정승 또한 자신들의 직무를 소홀히 하였다며 탄핵하였다.[『영조실록(英祖實錄)』영조 즉위년, 11월 21일] 이에 삼정승이 모두 사직을 하자, 사헌부에서 정동후의 상소로 이의연(李義淵) 등을 국사(鞫事)하는 일이 지연되었다며 정동후를 탄핵하는 바람에 오히려 삭탈관작(削奪官爵) 및 문외출송(門外黜送)을 당하였다.[『영조실록』영조 즉위년 11월 24일, 영조 즉위년 11월 25일]

1725년(영조 1) 4월 영조는 이의현(李宜顯)의 청을 받아들여 그를 다시 서용(敍用)하였다.[『영조실록』영조 1년 4월 20일] 이에 형조 참의(參議)와,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를 역임한 뒤에 외직으로 나가기를 구하여 양양(襄陽)을 다스리게 되었으며,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서 공조 참의를 지냈다.[『영조실록』영조 1년 7월 4일, 「정동후묘갈」] 그리고 1735년(영조 11) 3월 24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77세였다.

한편 그의 시문(詩文)을 모은 『영주록(瀛州錄)』이 남아 있다.[「정동후묘갈」]

성품과 일화

정동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태어날 때부터 총민하고 영리하여 날마다 수백 마디를 외웠으며, 말을 하면 남들을 놀라게 하였으므로 기동(奇童)으로 불리었다. 일찍부터 학문에 뜻이 있어서 손재(遜齋)박광일(朴光一)과 처사(處士)안여해(安汝諧)와 더불어 사이좋게 교유하면서 성리(性理)에 관한 여러 서적들을 탐색하였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견식(見識)이 정밀하고 투철하였으니, 비록 벼슬살이에 종사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본래 뜻이 아니었다.[「정동후묘갈」]

글의 풍격은 침울(沈鬱)하면서도 기력(氣力)이 있어서 사원(詞院)의 큰 문장가들에게 누차 칭상(稱賞)을 받았다. 삼연(三淵)김창흡(金昌翕)이 일찍이 그와 더불어 동악(東岳)에 놀러가서 창수(唱酬)한 시가 있었는데, 그를 ‘경적(勍敵)’이라고 하였다 전해진다.[「정동후묘갈」]

일찍이 한라산(漢拏山)의 고동(枯桐)을 얻어 거문고를 만들고는 흥이 일어나면 번번이 거문고를 타면서 스스로 소견(消遣)하였다. 비록 조정과 저자의 시끄러운 곳에서 지내더라도 조용하게 시골에 있는 듯한 상념을 지니고 대문 밖을 나가지 않은 것이 거의 10년이나 되었다. 일찍 부친을 여읜 아동으로서 남쪽의 외진 시골에서 몸을 떨치어 스스로 정밀하고 현달한 경지를 성취하였는데, 지조가 뚜렷하면서도 뭇사람들과 어긋나지 않았고 남들과 사이좋게 어울리면서도 시속(時俗)에 휩쓸리지 않았으며, 영정(寧靜) 담박(淡泊)하게 살다가 생애를 마쳤다.[「정동후묘갈」]

묘소와 후손

이재(李縡)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전해진다.[「정동후묘갈」]

부인 제주 양씨(濟州梁氏)는 양지항(梁之沆)의 딸이다. 자녀는 2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 정양원(鄭陽元)은 진사(進士)이고 차남 정양숙(鄭陽淑)은 요절하였다. 네 딸들은 사인(士人) 김택현(金宅賢), 이언성(李彦聖), 홍제화(洪濟和), 서명최(徐命㝡)에게 시집갔다.[「정동후묘갈」]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도암집(陶菴集)』
  • 『농암집(農巖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병산집(屛山集)』
  • 『겸재집(謙齋集)』
  • 『귀록집(歸鹿集)』
  • 『추암집(菴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