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결출병(田結出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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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결수에 따라 차출할 군인의 수를 정하던 제도.

개설

조선전기 군역제(軍役制)는 16세기에 이르러 사회경제적 변동 속에서 심각한 동요 현상을 보였다. 특히 농민층의 피역·도망에 의하여 그 동요는 촉진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실전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항상 부족한 상태였다. 1606년(선조 39) 병조(兵曹)의 보고에 의하면 군안(軍案)에 남아 있는 군인의 수는 평시의 1/3 이하에 불과하였다. 이 같은 상태에서 군역제를 재건하기 위하여 관료들이 모색한 대응안의 하나는 군역의 징발 기준을 바꾸는 것이었다. 종래 군역이 신역(身役)이라는 전제하에 인정(人丁) 중심으로 징발하던 데에서 전결(田結) 중심으로 징발 기준을 달리하는 전결출병(田結出兵)의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임진왜란이라는 비상한 상황에서 이 같은 방식이 채택될 수 있었다.

내용 및 특징

임진왜란 중 지방 수령들은 전결출병 방식으로 군대를 채우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1594년(선조 27) 10월 사간원에서는 전라도 일대 수군(水軍)의 충원이 ‘결부[結卜]에 따라 인부(人夫)를 충원’하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선조실록』 27년 10월 3일). 이 무렵의 군인 징발은 이미 허부화(虛簿化)된 종래의 군적에 의존할 수 없었다. 따라서 기존의 군적으로는 제대로 된 군인 징발이 이루어질 수 없었고, 결국 개별 민호의 전결, 즉 소유 면적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군인을 징발하기에 이르렀다.

1597년(선조 30) 1월 충청도관찰사유근(柳根)은 10,000명의 군인을 징발하기 위해서 1도(道)를 대상으로 전결출병을 시행하였다(『선조실록』 30년 1월 21일). 그 기준은 ‘토지 2결(結)마다 군인 1명을 세우는 것’이었는데, 대부분의 토지 주인은 전례대로 쌀을 내고 다른 사람을 대신 내보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 대규모로 군인이 징발되고 있었기 때문에 대신 보낼 수 있는 인적 자원도 넉넉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신 군역을 지는 대립(代立)의 금액은 쌀 10석(石)에 달할 정도로 치솟았다.

그러나 대립인들은 군영에 들어가면 도망을 일삼았으며, 이럴 경우 토지 주인을 다시 징발하였기 때문에 1도가 소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충청도관찰사의 전결출병 조치는 조정에서 논란이 될 만큼 대규모로 추진되었다. 이에 대가 세족도 출병의 부담을 면할 수 없어서 유망하는 자가 많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결국 전결출병 조치는 양반 지주층의 이해관계를 돌보지 않은 채 무리하게 군역을 차출함으로써 조정에서의 비난과 시행 상의 문제점에 직면해야 했다.

변천

임진왜란 중 일부 지역에서 실시된 전결출병 방식은 모든 병종(兵種)에서 일반화된 것은 아니었고, 또 그 이후 지속되지도 않았다. 군역이 인정(人丁)에게 부과되는 신역(身役)인 한, 전결출병은 임진왜란이라는 특수한 정세 속에서 일시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던 입역 방식이었다.

1623년(인조 1) 9월 서북 지방의 방비를 위해서 병력을 동원하였을 때, 다시 전결출병 논의가 제기되었다. 영의정이원익(李元翼)은 평안도의 전결 90,000여 결에서 각기 4결마다 1명의 군사를 차출하는 안을 제출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인조실록』 1년 5월 6일). 또 유형원(柳馨遠)도 『반계수록』에서 ‘이전출병(以田出兵)’의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농민 1명에게 1경(頃)의 토지를 분급하고 4경마다 병정 1명을 내도록 하며, 나머지 3명은 그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보인(保人)이 되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와 같은 전결출병의 논의 속에서 신역인 군역이 부분적으로 전결세화(田結稅化)되는 추세가 이어졌다. 이는 영조대의 균역법 단계에 이르러서 결작(結作)의 형태로, 제한적이나마 제도화될 수 있었다.

참고문헌

  • 김용섭, 「조선 후기 군역제의 동요와 군역전」, 『동방학지』 32, 1982.
  • 김종수, 「17세기 군역제의 추이와 개혁론」, 『한국사론』 22, 1990.
  • 윤용출, 「임진왜란 시기 군역제의 동요와 개편」, 『부대사학』 13,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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