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진(長津鎭)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함경도 장진에 설치한 진.

개설

장진진(長津鎭)은 세종대는 함경도 북청부(北靑府) 장진포(長津浦)였다. 1684년(숙종 10) 장진에 진을 두었다(『숙종실록』 10년 3월 13일). 1685년에 장진의 강가에 어면진(魚面鎭)을 설치하여 후주(厚州)의 백성과 군졸들을 소속시켰다. 1784년(정조 8) 장진보(長津堡)로 승격시켜 첨사를 두고 변방 지역의 수령을 지낸 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등용하도록 했다. 1785년(정조 9) 장진책별장(長津柵別將)을 올려서 장진진첨사(長津鎭僉使)로 삼았다. 1787년 장진진을 장진부(長津府)로 높였다. 1814년(순조 14) 장진부를 별해로 옮겼다. 1843년(헌종 9) 장진부를 다시 장진진으로 고치고 부사(府使)를 첨사(僉使)로 고쳤다. 1859년(철종 10) 또다시 장진진을 읍으로 회복시키고 부사로 삼게 했다. 1895년(고종 32) 장진을 삼수에 합쳤으며, 다시 장진군을 강계부(江界府)에 속하게 했다.

위치 및 용도

장진은 함경도와 평안도의 경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장진은 후주와의 거리가 2백여 리(약 79㎞) 된다. 이 지역은 여러 산봉우리들이 좌우로 둘러 있어서 1만의 장정으로도 열 수 없는 지역이었다. 여러 산봉우리 사이에 강을 따라서 들이 펼쳐져 있다. 길이는 수백 리가 넘고 넓이는 혹 수십 리가 된다. 토지도 비옥하여 모두 경작할 만하고 살 만했다. 함흥에서 장진까지 거리는 2백여 리가 된다. 만일 오랑캐의 기병이 장진의 빙판길을 경유해 온다면 3~4일도 걸리지 않고 함흥에 당도할 수가 있었다. 장진은 삼수부(三水府)와도 이웃하고 있다. 삼수에서 장진까지는 거리가 5백여 리(약 196㎞) 되는데, 그 사이 높은 고개와 험한 골짜기 때문에 말을 타고서는 지나가지 못하는 곳도 있다. 장진에는 장진강(長津江)이 있다. 이 강은 황초령(黃草嶺)에서 발원하여 장진부에 이르러 한태령(閑台嶺), 설한령(薛罕嶺)의 두 물과 합류해 삼수(三水)와 후주의 사이를 가로질러서 압록강으로 들어갔다. 이처럼 장진은 황초령·오만령·설한령(雪寒嶺)·한태령(罕台嶺) 등의 사이에 위치해 있어 보통의 관방이 아니었으며, 후주의 복심(腹心)이 되고 삼수와 갑산의 요해지(要害地)이며 함흥의 문호가 되었다.

변천 및 현황

장진진은 1684년(숙종 10)에 처음 설치되었다. 1685년에는 후주를 개혁하여 비워두면서 장진의 강가에 어면진(魚面鎭)을 설치하여 후주의 백성과 군졸들은 소속시켰다. 1784년에는 장진보를 승격시켜 첨사로 만들었다. 그런데 장진보의 위치가 외진 데다가 관부(官府)가 너무 멀고, 장진의 서쪽은 양지바른 데다가 북쪽은 평탄하고 높아서, 아전이나 남종이나 백성들 가운데 죄를 지어 도망하거나, 관청의 재물을 축내어 도망하거나, 군역을 회피하려는 자들이 앞을 다투어 모여든다 하여 읍을 설치하고자 하는 논의가 있었다. 이에 읍을 설치하는 대신 변방 지역의 수령을 지낸 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첨사에 임용하도록 했다. 1785년에 장진책별장(長津柵別將)을 올려서 장진진첨사(長津鎭僉使)로 삼았다. 1787년 8월 장진진을 장진부로 높였다. 곡식도 안 되고 사람도 살지 않는 곳이지만 변방을 막는 요새라 하여 읍을 설치한 것이다. 1814년에는 백성들이 흩어지고 관적(官糴)이 폐지되어 버려진 땅이 된 장진의 부전령(赴戰嶺) 서쪽에 있는 함흥의 병풍파(屛風坡)를 장진에 소속시켰다가 장진 역시 백성이 흩어지고 고을이 비게 되므로 땅이 넉넉하고 지세가 높고 험해 요해지가 되는 갑산의 별해로 장진을 옮겼다. 이듬해 1815년에 삼수의 이숙령(李淑嶺) 서쪽은 장진에 붙이도록 하고, 갑산의 별해(別害)와 별사(別社)는 분할하여 삼수에 붙이도록 했다. 1816년에는 장진부의 노탄봉수(蘆灘熢燧)를 파하고 읍참발소(邑站撥所)를 설치한 다음, 봉장(熢將)에게 주던 급료를 발장(撥將)에게 주도록 했다. 장진은 변장 이력을 경력으로 쳐주는 자리였으나 1841년(헌종 7년)에 무관 당하관(堂下官)의 자리로 만들었다. 그러다가 고을을 설치한 이래로 요역(徭役)이 많아서 백성이 사방으로 흩어졌기 때문에 1843년에 장진부를 장진진으로 고치고 부사를 첨사로 고치면서 여러 가지 포곡(逋穀) 1만 4천 석을 탕감해 주었다. 1849년(철종 즉위) 장진진에도 근무평가를 실시하여 관할 관리가 그 내용을 써서 올리게 했다. 이후 1859년(철종 10) 다시 장진진을 읍으로 회복시키고 부사로 삼았다(『철종실록』 10년 5월 19일).

형태

독진(獨鎭)의 방수장(防守將)이 지키는 곳이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장진 사람들은 장진의 군졸이 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토병(土兵)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천하게 보기 때문이었다. 이에 장교와 군졸이라는 명칭을 방수(防守)란 명칭으로 바꾸었다(『정조실록』 9년 12월 6일). 1801년 장진부사이여절(李汝節)이 황사영(黃詞永)을 잡았다고 감영에 보고했다. 그러나 사실은 사학(邪學)을 익힌 황성(黃姓)의 한 사람을 붙잡아 40여 차례 주리를 틀고 억지로 황사영이라는 거짓 자복을 받은 것이었다. 자복한 이는 황기운(黃基雲)이라는 자였다(『순조실록』 1년 4월 17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