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추숭(元宗追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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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6대 왕인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이부(李琈)를 사후에 추존왕 원종(元宗)으로 추숭한 전례(典禮).

개설

원종추숭은 인조의 친부였던 정원군과 어머니 계운궁(啓運宮) 구씨(具氏)를 대왕과 왕후로 추존하고 그들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祔廟)하기까지 진행되었던 일련의 전례였다. 여기에는 예학적·정치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1623년(인조 1) 5월부터 1635년(인조 13) 3월까지 약 12년간 조야에서 치열한 찬반 논쟁이 진행되었다. 이는 인조반정 이후 왕권이 안정되기까지의 최대 정치 현안이었다. 원종추숭 논쟁은 선조의 손자였던 인조가 반정(反正)으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선조의 대통을 계승한 데서 비롯되었다. 반정 이후에 선조의 아들인 광해군이 대통에서 축출되고 손자인 인조가 차례를 건너뛰어 대통을 계승하게 되자 이것이 종법(宗法), 즉 종통 계습법에 적합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인조와 반정의 주도 세력들은 이것을 비정상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여 이미 타계한 친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여 종묘의 소목(昭穆)을 조(祖)-부(父)-자(子)로 맞추고자 하였다. 소목은 순차적인 세대별 계승 차례를 말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관료와 학자들은 손자가 조부의 적통을 바로 계승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인식하여 추숭을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12년간에 걸쳐 대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전통 왕조에서 왕들이 자신의 생부를 왕으로 추존하는 의례는 드문 일이 아니었고, 조선에서도 성종의 아버지 덕종(德宗)을 추존한 선례가 있었다. 인조가 자신의 아버지를 추존하는 일도 특별히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았지만, 예상외로 많은 난관을 겪었다. 그래서 원종추숭 문제는 단순한 왕실의 전례로 끝나지 않고 국가적인 논쟁으로 발전하여 조야 전체를 동요케 하였고 12년이란 세월을 끌게 되었다. 그것은 반대하는 세력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여기에는 종통 문제를 보는 학자들의 학문적, 특히 예학(禮學)적 견해 차이와 정치 세력들 간의 대립이 있었다.

인조반정은 여러 가지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모든 관료나 백성이 이를 기꺼이 수긍한 것은 아니었다. 인조와 반정 주도 세력들은 이러한 정치적 위험을 해소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정권의 정통성 확립에 부심하게 되었다. 예학이 발달했던 당시에는 종묘 제사 계승에서 ‘적적상승(嫡嫡相承)’의 원리 즉 종법(宗法)이 중시되었다. 그러나 반정으로 왕위를 차지한 인조에게 종법적 정통성이 있을 수 없었다. 인조는 선조의 손자였으므로 대통의 승계에 더욱 곤란한 문제가 있었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반정의 명분이 떳떳하므로 종법상의 정통성이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보았으나 인조와 반정 공신들은 이 문제의 해소에 지나치게 집착하였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전례상의 해석과 방안이 강구되었다.

인조의 대통 접속 방법에는 두 가지 주요한 이론이 제기되었다. 하나는 김장생(金長生)의 ‘조통직승론(祖統直承論)’으로서, 이는 제왕가 종통의 특수성을 인정하여 사대부가와는 달리 아버지 없이도 조부의 대통을 바로 계승할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또 하나는 박지계(朴知誡)의 ‘예묘중계설(禰廟中繼說)’로서, 이는 제왕가에서도 아버지가 없는 종통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정원군을 추존하여 선조와 인조 사이의 공백을 보충해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원종추숭을 두고 조정이 찬반으로 나뉘어 장기간에 걸쳐 치열한 논란이 일어나게 된 데는 당시에 그 경향을 달리 하였던 두 조류의 예학 이론이 대립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 예학 연구의 중심은 종전의 오례(五禮)를 중심으로 한 왕조례(王朝禮)에서 사대부 계층에 보편화된 사례(四禮) 즉 가례(家禮) 쪽으로 전환되었다. 17세기의 조선 예학에는 신분 차별적인 고전 예학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으나, 그 속에서 서서히 사대부 예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왕조례와의 본질적 차이를 부정하는 새로운 경향이 대두하고 있었다. 이것이 원종추숭 전례를 두고 대립하였던 것이다.

발단

정원군의 추숭 논의는 1623년 5월 인조가 생가의 가묘(家廟)에 친제(親祭)할 때 쓸 축문(祝文)의 존속 칭호 논의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김장생은 인조가 이미 선조의 대통을 계승하였으므로 생부인 정원군을 아버지로 부를 수 없고 ‘백숙고(伯叔考)’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박지계 등은 인조가 조부의 대통을 직접 계승하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반드시 아버지 자리가 있어야 하므로 정원군을 아버지로 부를 것을 주장하였다. 이 칭호 문제에는 선조-정원군-인조 삼자 간의 계승 관계가 내포되어 있었다.

1623년의 존속 칭호 문제로 원종추숭론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 대부분의 관료들과 학자들은 제왕례의 특수성을 강조하여, 추숭을 반대하는 고전 예학의 신분 차별주의적 입장에 서 있었다. 문제는 왕실의 대통 계승에 있어서 손자가 아버지를 거치지 않고 조부의 종통을 직접 이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제왕가에서는 왕위에 오른 사람만이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기 때문에 그 특수성이 인정될 수 있었다. 김장생은 이러한 고전적인 입장에 서서 추숭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박지계를 비롯한 추숭론자들은 근본적으로 제왕례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왕가도 하나의 가문인 이상 종통 계승에 있어서 보편적인 종법의 원리가 준수되어야 한다고 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없는 조부의 대통 계승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보편적 원리 때문에 그는 제왕가의 예와 사대부의 예에 차별이 있을 수 없고, 제왕가에서도 사대부의 가례를 준행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경과

원종 추숭 문제는 1626년(인조 4)에 왕의 생모 계운궁이 죽고 상례 과정에서 인조가 입을 상복 문제 때문에 크게 고조되었다. 계운궁에 대한 상복은 곧 정원군과 인조의 친속 명분을 정하는 문제이기도 하였다. 원종추숭을 지지하는 측은 삼년복(三年服)을 주장하였고, 반대하는 쪽은 부장기복(不杖朞服)을 주장하였다. 인조는 결국 장유(張維) 등의 건의에 따라 절충적인 장기복(杖朞服)으로 정하였다. 1628년(인조 6)에 계운궁의 상을 마치고 신주를 부묘(祔廟)할 때부터 원종추숭은 공공연한 정치 현안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630년(인조 8) 7월부터 조정은 물론 산림 학자들과 태학의 관학생 및 지방의 유생들까지 참여하는 대대적인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결국 3년여를 다툰 끝에, 1632년(인조 10) 5월 정원군과 계운궁을 각기 원종대왕(元宗大王)과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존하여 그들의 신주를 별묘(別廟)인 숭은전(崇恩殿)에 봉안하였고, 다시 3년간 더 격론을 거쳐 1635년(인조 13) 3월 종묘에 부묘(祔廟)함으로써 오랜 전례 논쟁이 끝나게 되었다.

원종추숭을 가장 갈망했던 사람은 바로 인조 자신이었고 그 운동을 추진했던 주체세력은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이해(李澥) 등의 공신들이었다. 이들에게 예학적인 이론과 근거를 제공한 학자는 당시 대표적 사림 학자였던 박지계와 그 문인들이었다. 여기에 권력과 공론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주변 인물들 및 극소수의 한미한 유생들이 가담하였다.

추숭에 반대하여 그것을 저지하고자 했던 세력은 김장생·장현광(張顯光) 등의 대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전체 사림과 이원익(李元翼)·신흠(申欽)·오윤겸(吳允謙) 등의 대신, 정경세(鄭經世)·김상용(金尙容)·홍서봉(洪瑞鳳) 등 대부분의 중신들과 삼사(三司)의 젊은 관원들 및 관학(館學) 학생들과 기타 대다수 지방 유생들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들의 추숭 반대에는 종법에 대한 학문적 입장 외에도 정원군 개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한몫을 하였다. 정원군은 선조대에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과 함께 악명이 높았던 왕자였기 때문이다.

의의 및 평가

원종추숭은 결국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의 종법적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당한 왕위 계승권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력 동원에 의해 스스로 왕위를 취득한 인조로서는 취약한 종통 계승의 명분을 선양하고 종묘 전례상의 결함을 보완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인조는 반정 후 몇 년간 공신들의 발호와 민심의 이반으로 긴장하였고, 유교적 원칙론을 강요하는 관료들의 언론과 사림의 여론에 시달렸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조금씩 전제권을 확보하고 여론과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원종추숭은 조야 공론과의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 지면 인조의 왕권 확립이 어렵게 되었다. 그는 친위세력인 반정공신들의 완력과 박지계 같은 일부 재야학자들의 이론에 힘입어 공론을 누르고 추숭을 성사시킴으로서 관료들의 신권에 대한 왕권의 우위를 확립할 수 있었다. 이 전례 논쟁은 훈척(勳戚)이 중심이 된 근왕(勤王) 집단과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원리와 전통을 강조하는 사림(士林) 집단의 대립과 갈등이기도 하였다. 이는 곧 공신계와 비공신계 관료들의 정국 주도권 싸움으로 볼 수도 있다. 도덕성과 명분에서 떳떳치 못했던 훈척 세력은 왕권에 결탁함으로서 그들의 특권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반면 도학정치를 이념으로 하는 사림 집단은 원칙과 명분에 의한 선명성의 확립을 정국 주도권 장악의 수단으로 여겼다.

원종추숭은 12년간의 논쟁 끝에, 단순명쾌한 박지계 예론의 탁월성 및 왕과 훈척 세력의 완력으로 성사될 수 있었다. 이는 예학적으로 『가례(家禮)』 중심의 보편주의 예론이 전통적 분별주의 예론을 압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인조의 왕실 권위와 왕권 강화가 이루어지고 사림 세력에 대한 훈척 세력의 우세, 조정의 공론에 대한 왕의 전제권이 우세해져 간 당시의 정치적 추이를 반영하며, 근왕 집단의 권력 강화에 이용되었다. 이후 국가 전례를 둘러싼 예학적 논쟁은 정국의 추세를 판가름하는 정치 분쟁으로 곧잘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예학논쟁에서 전통적인 제왕례의 특수성에 대한 인식은 점차 퇴색하고, 16세기 이후 조선 양반사회에 풍미하게 된 『가례』의 보편성에 대한 강조가 왕실의 전례에도 점차 비중을 더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사계전서(沙溪全書)』
  • 『잠야집(潛冶集)』
  • 이영춘, 『조선후기 왕위계승 연구』, 집문당, 1998.
  • 서인한, 「仁祖初 服制論議에 대한 小考-啓運宮具氏의 喪葬을 中心으로-」, 국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2.
  • 이영춘, 「潛冶 朴知誡의 禮學과 元宗追崇論」, 『淸溪史學』7, 1990.
  • 이영춘, 「沙溪 禮學과 國家典禮」, 『沙溪思想硏究』,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