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몽린(元夢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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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48년(인조 26)∼1674년(현종 15) = 27세]. 조선 중기 효종(孝宗) 때의 문신이자, 효종의 딸인 숙경공주(淑敬公主)의 남편으로 부마(駙馬). 자는 용여(龍歟)이고, 호는 죽서(竹西)이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며, 숙경공주와의 결혼으로 흥평위(興平尉)에 봉해졌다.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를 지낸 원만리(元萬里)이고, 어머니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이조 참판(參判)을 지낸 이시해(李時楷)의 딸이다. 친할아버지는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원두표(元斗杓)이고, 양할아버지는 광주부윤(廣州府尹)을 지낸 원두추(元斗樞)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중추원(中樞院)지사(知事)를 지낸 원유남(元裕男)이다.

현종 시대 활동

1659년(효종 10) 효종의 딸 숙경공주와 혼인하여 흥평위에 봉해졌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10년 윤3월 11일] 1661년(현종 2) 광덕대부(光德大夫)에 올랐고, 여러 차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현종실록』현종 2년 윤7월 1일,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7년 3월 26일]

1671년(현종 12) 1월 숙경공주가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현종개수실록』현종 12년 1월 9일] 이듬해인 1672년(현종 13)에는 사은사(謝恩使)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어 연경(燕京)으로 가던 중 의주(義州)에 이르러 아버지의 상을 당하는 바람에 돌아왔다.[『현종개수실록』현종 13년 5월 15일] 그리고 연이어 1673년(현종 14)에는 할머니의 상을 당하였으므로 매우 슬퍼하다가 1674년(현종 15) 3월 17일 사망하였으니, 향년 27세였다.[『현종개수실록』현종 15년 3월 17일, 『도곡집(陶谷集)』 권9 「흥평위원공신도비명(興平尉元公神道碑銘)」 이하 「원몽린신도비명」]

성품과 일화

원몽린의 성품과 자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성품이 방정(方正)하고 인서(仁恕)하였으며 간이(簡易)하여 사람들과 화협(和協)하였다. 남에게 속마음을 따로 두지 않았고 일처리에서는 구차스럽게 영합하려고 하지 않았다. 예(禮)로써 현인과 하사(下士)를 대하고 가난한 자를 진휼(賑恤)하였으며 특히 성색(聲色)은 끊어 버렸다. 형제들과 우애가 깊었는데 이런 행식의 모든 근본은 효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원몽린신도비명」]

또 어린 나이에 효종의 부마로 봉해지고 아버지와 할머니 상을 연이어 당해서 피눈물 흘리며 슬퍼하다가 몸을 상해 그 때문에 27세의 나이에 죽으니, 군자가 말하기를, “효성스럽다. 그 독의(篤誼)의 지성(至性)은 증삼(曾參)과 민손(閔損)의 뛰어난 효성과 어찌 큰 차이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원몽린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원몽린의 묘소는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상구리에 있으며, 부인인 숙경공주와 합장하였다. 이의현(李宜顯)이 쓴 묘비명이 있다.

숙경공주는 효종과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제5녀이다. 자녀는 1녀를 두었으나 일찍 사망하였고, 원몽린의 동생 원몽기(元夢冀)의 아들 원명귀(元命龜)를 후사로 삼았다.[「원몽린신도비명」]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도곡집(陶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