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獄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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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범죄자 및 용의자가 의금부와 포도청에 체포되어 감옥에 감금된 죄수.

내용

조선전기 범죄자를 직접 체포하고 수금할 수 있는 직수아문은 병조(兵曹)·형조(刑曹)·한성부(漢城府)·사헌부(司憲府)·승정원(承政院)·장례원(掌隷院)·종부시(宗簿寺)·관찰사(觀察使)·수령(守令) 등이 있었지만 조선후기에는 비변사(備邊司)·의정부(議政府)·포도청(捕盜廳)이 추가되었다. 또한 1392년(태조 1) 전옥서(典獄署)가 설치되어 구금된 죄수의 행형(行刑)을 관장하였다.

옥수(獄囚)는 남녀 구별이 엄격하여 남옥(男獄: 東圜)과 여옥(女獄: 西圜)으로 나누어 수감하였다. 옥수는 옥중에서 수갑(手匣)과 가쇄뉴(枷鎻杻)를 채웠는데, 병들어도 이를 풀어주지 않았다. 또한 그들에게는 의복·식량·의약 등을 제공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이 외부에서 의복과 음식을 제공해 생명을 유지하였다.

이들 직수아문의 감옥에 갇힌 죄수는 사건 조사와 판결을 받기 위해 대기하였는데, 사건 처리가 지체되면 장기간 옥살이를 하였다. 옥중의 죄수는 형신(刑訊)이 가해지고 수갑(手匣)·가쇄(枷鎖)를 채워 그 고충 때문에 판결을 마치기 전에 사망하는 사례가 많았다.

중국의 당·송 이래 존속했던 옥수(獄囚)에 대한 삼한지법(三限之法)을 조선에서도 차용하여 대사(大事: 사형)는 90일, 중사(中事: 도·유형)은 60일, 소사(小事: 태·장형)는 30일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옥수는 일반적으로 범죄의 경중을 구분하지 않고 공동으로 수금되었기 때문에 경범죄인까지 고초를 겪어야 했다. 또한 감옥은 더위와 추위에 대비한 시설이 열악해서 옥수가 사망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법치보다 덕치를 내세웠던 조선의 왕들은 옥수에 대한 구휼을 다양하게 시행하였다. 1442년(세종 24) 왕의 수교로 옥수에 대한 보호 조치가 강화되었다. 또한 왕은 가뭄과 한재(旱災) 등 기후가 악화될 경우 중죄인을 제외한 경범죄인은 사면하기도 하였고, 죄의 경중을 따져 경범죄인에 대한 심리를 신속히 처리할 것을 명령하였다.

용례

上下敎曰 禁府刑曹及諸道啓聞中 係干刑獄及明火賊殺越人命之類 依近例會于賓廳議啓, 俾無獄囚久滯之弊(『숙종실록』 43년 5월 10일)

참고문헌

  •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 『육전조례(六典條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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