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건보(永建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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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함경도 온성의 보청보, 적석봉에 군사적 목적으로 수축한 석성.

개설

보청포(補靑浦)와 적석봉(積石峰) 등지는 온성의 주요한 군사 요충에 자리하고 있어, 1464년(세조 10) 5월 이곳에 석성을 수축하고 이를 영건보라 칭하고 만호를 임명하여 이곳을 담당하도록 하였다(『세조실록』 10년 5월 1일). 여진의 침공 길목에 있었으므로 16세기 말까지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았다. 영건보는 주변의 진보 등에 적침이 있을 경우 사전에 계획된 바에 따라 그들을 추격하도록 하였다.

위치 및 용도

영건보는 북쪽으로는 온성진과 거리가 1식(息)인 30리(약 12㎞)이고 유원진(柔遠鎭)과 1식 10리이며, 남쪽으로 동관진과의 거리가 20리(약 8㎞)였다. 여진족이 영건보를 공격할 경우에는 휴암(鵂巖)과 고연대(古煙臺) 등지에서 적을 추격하도록 하였다. 만일 온성진이 공격을 받으면 영건보의 군병들은 휴암참에서 적을 추격하도록 하였고, 유원진이 적의 공격을 받으면 온성의 국사당(國祀堂)까지 적을 추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전진(美錢鎭)이 적의 공격을 받으면 임자 고개에서, 황자파보(黃柘坡堡)가 적의 공격을 받으면 미전진의 지경인 소야지 고개에서 적을 추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동관진이 적의 공격을 받으면 이라천(伊羅川) 가에서 적을 추격하도록 하였다.

변천 및 현황

1464년에 건설된 영건보는 이후 1493년(성종 24)에 한 차례 개축에 착수하여 이듬해 완공하였다(『성종실록』 24년 10월 6일). 영건보는 16세기 후반인 1583년(선조 16) 3월 니탕개의 난 시기 여진이 온성진 일대를 공격하여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중인 1594년(선조 27)에는 역수부 여진이 영건보를 포위하여 공격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7년 10월 11일).

형태

16세기 말 편찬된 『제승방략(制勝方略)』에 의하면 영건보는 성의 둘레가 2,111자(약 640m)이고 높이는 8자(약 2.4m)이며 여장(女墻)이 157곳 있었다. 성곽 시설로는 옹성(甕城)이 2개소, 곡성(曲城)이 8개소가 있었으며 성문은 남문과 서문 2군데가 있었다. 그리고 천정(泉井)이 3곳 있었다. 이곳의 방어 군병으로는 이 지역의 군병인 이른바 토병(土兵)이 80명, 남쪽에서 파견된 군사가 49명이 있었다. 당시 이곳에는 궁자(弓子) 215장, 장전(長箭) 677부 5개, 편전이 662부 12개가 비축되어 있었다고 한다.

관련사건 및 일화

세조대 이후 선조대까지 여진족의 침공이 계속될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특히 니탕개의 난에서 영건보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1594년(선조 27)에 종성 경계에 있던 역수부(易水部)의 야인들이 내륙 지역의 여러 부족과 합세하여 주변을 약탈하고 영건보를 포위 공격하였다. 이에 그해 9월 북병사정현룡(鄭見龍)으로 하여금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이들의 본거지를 공격하게 하였다. 정현룡은 이들의 본거지를 함락하고 3백여 명의 머리를 베어 개선하였다(『선조실록』 27년 10월 11일).

참고문헌

  • 『제승방략(制勝方略)』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일성록(日省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여지도서(輿地圖書)』
  •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와 북방영토의식』, 경서원, 2000.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채계」,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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